“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삼성전자가 사용하고 있는 삼성반도체통신의 64K, 256K D램은 우리 특허를 침해했습니다. 로열티로 8500만달러를 우리에게 지급해야 합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의 직원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미국인은 삼성전자에 반도체 특허를 침해했으니 로열티를 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8500만달러는 1985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가운데 85%가 넘는 액수였다. 삼성전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이 조건은 다음 협상의 최소 기준이 되리라는 것을 당시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1986년 TI는 미국 댈러스 지방법원과 워싱턴 소재 미국 국제무역위원회에 한국 삼성전자와 일본의 7개 회사를 제소했다. 이듬해에는 현대전자에도 동일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반도체 치킨게임으로 경영상 어려움에 부닥쳐 있던 TI는 특허 소송으로 위기를 뚫으려 했다. TI의 준비는 치밀했다. 일본 기업과는 해당 특허에 대해 크로스라이선스를 체결하고 약정 기술료를 받아왔다. TI는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을 노려 이들을 제소했다. 로열티를 대폭 높이기 위한 `선제소 후협상` 전략이었다는 의미다. 결국 샤프를 시작으로 일본 기업은 모두 TI에 무릎을 꿇었다.
남은 기업은 한국의 삼성전자 한 곳밖에 없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삼성의 64K, 256K D램과 이를 탑재한 제품에 대해 수입 금지 결정을 내렸다. 삼성전자는 6개월을 더 버티다가 결국 TI 측 요구를 전면 수용했다. TI가 처음 제시한 8500만달러를 로열티로 지급했다. 7개 일본 기업이 지급한 로열티 총액이 1억3000만달러인 점을 감안할 때 삼성이 TI에 지급한 로열티는 실로 엄청난 액수였다.
5년마다 연장되는 이 계약으로 TI는 총 10억달러를 로열티로 벌어들였다. 삼성은 `특허가 곧 엄청난 돈이다`라는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건희 회장은 `특허경영`을 특명으로 내린다. 특허 개발의 기반이 되는 연구개발(R&D) 인프라를 확충하면서 미래 사업을 대비한 종자 개발에 주력했다. 삼성이 `종합기술원`을 세운 것도 이즈음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매년 미국에서 IBM에 이어 특허를 많이 내는 기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현대전자도 이 시기의 특허 침해 소송을 계기로 R&D의 중요성을 깨닫고 1M D램부터 기술 이전 없이 자체 개발을 강행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