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기술이 일본과 격차를 좁혀 나가고 있을 무렵 삼성과 현대전자, 금성일렉트론 간 자존심 싸움은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현대전자와 금성일렉트론은 4M, 16M D램 개발 경쟁에서 번번이 삼성보다 늦어 내부로는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다.
당시 관련 제품 개발 건은 정부 주도 아래 국책 과제로 이뤄졌다. 3사 공동 개발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긴 했지만 사실상 회사별로 독자 개발을 했다는 것이 당시 현업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64M D램 역시 국책 연구개발(R&D) 사업으로 시작됐다. 3사의 공동 목표는 1992년 3월까지 제품 설계를 완료하고 이듬해 3월까지 시제품 개발을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1992년 8월 모든 셀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64M D램 시제품을 자체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 일본도 성공하지 못한 쾌거였다. 삼성전자는 1991년 10월에도 64K D램 시제품을 선보인 적이 있지만 그때는 모든 셀이 작동하는 제품은 아니었다.
삼성의 발표에 현대전자와 금성일렉트론이 발끈했다. 현대는 “이보다 앞선 7월에 64M D램을 개발해 놓고도 정부 주도 공동개발 협약에 따라 단독 발표를 미뤄 왔다”면서 “이번 새치기 발표는 공동 국책사업 추진에서 있을 수 없는 비신사 행위”라고 비난했다.
금성일렉트론도 “국내 반도체 3사 모두가 64M D램 개발을 완료해 놓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삼성전자의 이번 단독 발표는 가전 분야 부진 등에 따른 침체된 회사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삼성전자는 두 회사의 공격에 “시제품 개발은 각사가 독자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체 발표를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삼성은 현대와 금성이 16M D램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음에도 양산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 64M D램도 앞서 나갈 것이라고 자신했다.
현대전자와 금성일렉트론이 삼성의 발표에 발끈한 것은 `이번에도 뒤졌다`는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들의 다툼은 계속됐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주의 조치`를 내림으로써 일단락됐다.
삼성전자는 1994년 12월부터 64M D램 양산에 들어갔다. 세계 최초였다. 현대전자와 금성일렉트론은 1997년께 64M D램 양산에 착수했다. 삼성전자는 개발·양산 기술 분야에서 해외는 물론 국내 경쟁사를 압도하고 있었다.
일부 잡음이 있긴 했지만 국내 반도체 3사의 경쟁이 기술 진보를 이루는 상승 효과로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삼성전자는 1992년 D램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의 도시바를 누르고 사상 처음으로 1위를 기록했다. 당시 금성일렉트론은 8위, 현대전자는 9위에 각각 올랐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 모두가 10위권 안에 들어간 것이다. 이 같은 성과를 낸 배경에는 국내 대기업 간 자존심 경쟁이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