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토마스 모어와 `2017년 대한민국`

최근 영화전문 케이블TV 채널에서 `천일의 스캔들`이라는 영화를 봤다. 헨리 8세와 왕비 앤의 위험한 사랑을 그린 영화다. 이 이야기는 영국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인 만큼 많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고 있다. 개봉한 지 9년이나 지난 영화를 언급한 이유는 중간쯤 나오는 헨리8세의 대사 때문이다.

“모어경이 보고 싶군.”

여기에 등장하는 모어경은 한 번쯤 들어왔던 토마스 모어다. 모어는 헨리 8세와 왕비 캐서린의 이혼, 그리고 앤과 재혼 과정에서 벌어지는 교황청과의 갈등 과정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다 반역죄로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이후 헨리 8세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자, 현명한 조언을 해줄 토마스 모어를 그리워한다. 앞서 언급했던 대사는 이 때 헨리 8세의 독백이다.

토마스 모어는 1477년 런던에서 변호사 존 모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해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링컨법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해 스물한 살 때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헨리 7세 때 하원의원을 지냈고, 헨리 8세 때 신임을 받아 1529년 `대법관(Lord Chancellor)`에 임명됐다. 요즘 말로 `금수저`로 태어나 엘리트 코스만 밟았다.

당시 대법관은 요즘의 국회의장과 대법원장, 국무총리를 다 합한 최고 권력이었다.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이 이 지위에 오른 건 토마스 모어가 처음이었다. 그는 `털어도 먼지 안 나는` 양심적인 법관, 공정하고 신속한 소송 처리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인 `유토피아`는 산업자본부의가 태동하던 초기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1516년에 썼다. 제1부는 1500년 당시 영국 농민들이 겪던 처참한 삶의 현장을 고발한다. 그는 당시를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고 비유했다.

영국 플랑드르에서 모직 공업이 흥성해 양모 값이 폭등하자, 영국 귀족들은 밀밭을 초지로 바꾸어 양 떼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은 대대로 땅에서 생계를 이어오던 농민들을 추방해버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쫓겨난 농민들을 받아줄 새로운 생산관계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결국 농민들은 거리의 부랑자로 내몰렸다. 당시의 법은 이들에게 매우 혹독했다. 자신의 고용주를 만나지 못하면 혹독한 매를 맞거나 심하면 반역죄로 처형됐다.

모어는 이런 상황을 개인의 불행이 아닌 잘못된 사회적 관계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는 사유재산 폐지, 2년 도농 간 순환 살림살이, 주민 자치제,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하며 시민이 주인인 나라 `유토피아`를 주장한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스스로도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해 이름 지은 것 같다.

토마스 모어가 살다간 지 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가 비판했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주민 자치제와 하루 6시간 노동 등은 제도의 일부, 혹은 특정 국가 등에서 지속적으로 시험되고 있다. 심한 매질과 단두대 처형도 사라졌으니, 현재의 삶이 1500년대 토마스 모어가 살던 시대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도 같다고 위안해 본다.

설 연휴가 지났다. 오늘부터 우리는 정유년 한해를 숨 가쁘게 살아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단두대에 올라서도 잃지 않았던 여유와 웃음을 서로에게 강권해 본다.

`내 목이 짧으니 자를 때 유의해 주고, 내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잘리지 않아야 하네.` 죽음보다 자신의 영혼과 양심을 소중하게 여겼던 토마스 모어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