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 <57> 메디치 방식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 <57> 메디치 방식

15세기 도시국가 피렌체. 한 남자가 대성당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성당 한 쪽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꼬마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그만 대리석 덩이를 깎고 있었다. 조각 모양은 금세 눈에 들어왔다. `파우누스(Faunus)`. 로마 신화에 나오는 남자 얼굴과 몸에 뿔과 염소 다리가 달린 반인반수. 디테일과 생동감이 놀라웠다.

아이를 데려와서 자기 자녀와 함께 양육한다. 이 아이는 훗날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다. 그를 찾아낸 이는 메디치가 당주인 로렌초 데 메디치였다. 재능 있는 정치인이자 사업가. 사후 `위대한 로렌초`로 불렸다.

실리콘밸리는 우리 시대의 혁신 아이콘이다. 영국은 탬스밸리, 두바이는 실리콘오아시스를 만들었다. 이름은 닮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혁신은 쉽지 않다. 작동하는 새 혁신 방식 찾기란 더더욱 어렵다. `천재의 공간:아테네로부터 실리콘밸리까지`의 저자 에릭 와이너는 500년을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 천재를 보자고 말한다.

그들 방식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젊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피렌체의 한 공방을 찾는다. 안드레아 베로키오는 진작 천재성을 알아본다. 베로키오는 당대의 대가였다. 화가로서 `예수의 세례`를 남겼다. 베네치아의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은 명작으로 꼽힌다.

그의 데생은 다빈치가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 준다. 유능한 스승이기도 했다. 닭장 관리를 맡겼다. 달걀은 템페라 물감의 중요한 재료였다. 베로키오는 현명한 멘토였다. 산드로 보티첼리, 피에트로 페루지노, 로렌초 크레디가 거쳐 간 이곳에서 다빈치는 대가로 성장했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권력가였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을 채울 대작을 상상했다. 이즈음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 이름을 알렸지만 화가로서의 경력은 미미했다. 로렌초 메디치의 추천을 받는다. 어차피 누구도 해본 적 없는 대작 아니던가. 로렌초는 영향력 있는 후원자였고, 율리우스 2세는 재능에 손을 들어준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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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는 르네상스 혁신에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첫째로 혁신은 혁신으로부터 나온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는 그런 곳이었다. 멘토와 멘티 관계로 맺어져서 시공의 한때에 모여 분출한다.

둘째로 후원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다빈치를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에 소개한 것도 로렌초였다. 셋째로 실적보다 재능과 잠재력을 봤다. 대작 시대였다. 누구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런 만큼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넷째로 경쟁은 혁신으로 이어졌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로렌초 기베르티는 `천국의 문` 프로젝트를 놓고 경쟁했다. 심사위원조차 우열을 가리지 못한다. 공동 작업을 제안한다. 브루넬레스키는 거절하고 피렌체를 떠난다. 로마 판테온의 지름 43.3m짜리 돔은 한동안 그에게 사색 장소가 된다.

시간이 지나 피렌체 대성당의 돔 건축을 놓고 다시 경쟁한다. 판테온보다 큰 돔을 어떻게 건축할지 누구도 대안이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사람들 앞에서 계란을 들고 한 모퉁이를 탁자에 내리쳐 깬 다음 세워 보인다. “누군들 못하랴” 하자 “앞으로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에피소드는 정작 블루넬레스키 것이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판테온과 달리 계란을 닮았다.

다섯째로 재난이 혁신의 봇물을 트기도 한다. 흑사병은 중세의 경직성을 흔들었고, 결국 르네상스를 낳았다.

로렌초는 매사에 빈틈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재능을 알아봤다.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은 창조를 가치 있게 봤다. 혁신 프로젝트는 후원자를 찾았다. 공방 시스템은 가치 있는 지식을 전하기에 유리했다. 멘토와 멘티의 관계는 진지하고 살아 있었다.

메디치 방식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보인다. 그런 만큼 혁신의 본질에 더 가깝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실리콘밸리보다도 더욱….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