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는 기술 잠재력이 높은 협력사를 '기술혁신기업'으로 선발하고 이들을 집중 육성하는 새로운 상생협력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그간 동반성장협의회 운영, 특허 이전, 동반성장펀드 등 협력사 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해왔다. 기술혁신기업은 이른바 강소기업을 발굴하고 이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육성, 지원하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최태원 SK 회장 지시대로 '파격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2017년 SK하이닉스 기술혁신기업으로는 에이피티씨(APTC), 오로스테크놀로지, 엔트리움 3개 기업이 선정됐다. 향후 2년간 SK하이닉스와 공동 기술개발 등 포괄적 지원을 받게 된다. 개발된 제품은 SK하이닉스 생산라인에서 우선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기술개발 자금과 컨설팅을 제공하고 최소 구매물량을 보장해 협력사 재무 위험을 줄여줄 계획이다.
단순한 '기부' 차원에서 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SK하이닉스도 이익을 얻는다. 외산 의존도를 줄이거나 가격 협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협력사가 자유롭게 연구개발(R&D)을 할 수 있도록 제반 환경을 갖춰주면 창의적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 세계 최초 상용화 사례도 나올 수 있다고 기대한다.
◇국산 식각·계측 장비 역량 확대
국내 반도체 장비는 대부분 증착 분야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APTC는 드물게 식각(Etch) 장비 경쟁력을 보유한 업체다. 식각은 노광으로 새겨진 회로 패턴이나 증착 공정으로 얹어진 박막을 화학·물리 반응을 이용해 깎아 내는 공정이다. 공정 미세화로 노광 횟수가 늘어나면서 식각 작업 역시 많아졌다. 장비 구매량도 늘었다. 미국 장비업체 램리서치 의존도가 높다.
APTC는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출신 김남헌 사장이 2002년 설립했다. 김 사장은 플라즈마 소스, 식각 장비 등 R&D 경험이 풍부하다. 2005년 SK하이닉스 전략 파트너로 선정돼 식각 장비를 개발해온 이력이 있다. 2007년 폴리실리콘 식각 장비 대비 기술 난도가 한 단계 낮은 옥사이드·메탈 식각 장비를 상용화했다. 2013년에는 폴리실리콘 식각 장비 개발에 성공했고, 정밀도와 성능을 높여 지난해부터 SK하이닉스로 대량 공급하고 있다. APTC 폴리실리콘 식각 장비는 20나노급 이하 공정에서 분리 절연막(STI)을 생성할 때나 게이트 생성 공정 때 활용된다. 이번 프로그램 참여로 식각 장비 성능을 보다 높이는 데 매진한다. SK하이닉스가 구매물량을 사전에 확정해 줬기 때문에 R&D에 따르는 재무적 어려움도 크게 해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로스테크놀로지는 반도체 부품인 마스크용 펠리클 전문업체 에프에스티(FST) 자회사다. APTC와 마찬가지로 다른 국내 기업이 손대지 못했던 계측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 2010년부터 본격 사업을 시작한 오로스는 미국 KLA-텐코가 독점하고 있는 오버레이 계측 장비를 2011년 국내 최초로 상용화했다. 광학 오버레이 측정 장비는 여러 층으로 쌓아진 증착 물질이 제대로 정렬됐는지를 측정한다. 증착 층을 쌓을 때마다 이 장비를 통해 나노 단위로 오차를 파악하고 노광기 위치를 보정한다. 해상력과 정밀도, 램프 수명 등이 경쟁력이다. 오로스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장비 경쟁력을 높이면 SK하이닉스 역시 KLA-텐코와의 구매 협상력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스프레이 방식 EMI 차폐재 생산 독려
2013년 창업한 엔트리움은 신생기업이지만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잉크 방식 전자파차단(EMI) 차폐재를 개발, SK하이닉스에 먼저 기술 도입을 제안했다.
EMI 차폐는 반도체 패키징 업계에서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기술이다. 과거에는 캔 방식으로 덮개를 씌워 EMI 차폐를 했다. 그러나 최근 반도체 칩 성능이 좋아지면서 개별 칩마다 미세 차폐 공정을 수행하는 방식이 트렌드로 떠올랐다. 애플은 일찌감치 전자파 간섭으로 인한 제품 이상 동작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폰에 탑재되는 개별 칩마다 EMI 차폐를 요구하고 있다. 통상 아이폰에 신기술이 도입되면 후발 주자들은 이를 그대로 따라한다. EMI 차폐 시장이 커질 것이란 기대가 나오는 이유다.
지금까지는 개별 칩 EMI 차폐에 스퍼터링 방식을 활용, 초박형 금속 차폐재를 씌워 왔다. 스퍼터는 재료에 물리력을 가해 대상 표면에 박막을 고르게 증착시키는 장비다. SK하이닉스는 스퍼터 대신 스프레이 공정 방식을 선택했다. 이 방식을 상용화하려면 잉크 형태 차폐재가 필요하다. 이 솔루션을 엔트리움이 제공하고 있다. 스프레이 EMI 차폐 공정의 상용화 성공 여부는 SK하이닉스 입장에서도 급한 사안이다. 지금 외부 업체에 맡기고 있는 물량을 내부로 돌려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스프레이 방식 EMI 차폐 공정을 상용화하면 가장 크게 혜택을 보는 곳은 소모품을 공급하는 재료 업체”라면서 “상용화 성공 여부 역시 재료에 달렸다”고 설명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