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사 상대로 어떻게 소송을 겁니까. 회사 문 닫을 각오가 아니라면 불가능해요. 글로벌 장비 기업만큼 파워가 있다면 과연 이렇게 했을까요.”
최근 몇 군데 장비 기업으로부터 하소연을 들었다. 국내 패널 제조사가 자사 장비 기술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의 타사 장비를 구매했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러니하게 그 장비를 제작한 곳은 패널 제조사와 같은 그룹 소속이다.
기술 도용, 특허 침해는 기업에 민감한 문제다. 해당 기술로 생산한 제품 판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 경쟁이 치열한 디스플레이·반도체 기업은 앞으로 도입할 장비와 기술이 특허 시비에 휘말릴 조짐을 보이면 구매를 보류한다. 반대로 경쟁사에 특허 시비를 걸어 영업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기술 도용이 의심된다면 소송으로 시비를 가리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패널 제조사와 한 식구인 그룹 계열사를 상대로 소송한다는 것은 '절대 갑'인 패널사와 소송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의혹은 해소할 수 없고, 억울함은 커질 수밖에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신기술을 개발, 신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
패널사와 협력사는 서로 힘을 합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단가, 기술 확보 주도권 등을 놓고 힘겨루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패널사보다 힘이 큰 협력사는 극소수의 글로벌 기업에 불과하다. 당장 사업 기회를 저버릴 정도로 여유 있는 국내 협력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장비 시장에서 벌어지는 기술 모방 이슈를 그저 '참을 수밖에 없는 일'로 치부해야 할까. 디스플레이와 반도체는 기술 난도가 높아질수록 장비, 부품, 소재 등 협력사의 기술력이 성패를 좌우한다. 디스플레이·반도체 기업이 실력 있는 외부 기업을 찾고, 핵심 협력사 육성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어느 때보다 '상생'이 절실하다. 기술을 도용당하고도 문제 제기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진짜 상생은 가능할까. 협력사가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문화가 조성돼야 신뢰 관계도 두터워진다. 대기업이 협력사의 '진짜 목소리'를 외면해선 안 된다.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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