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칼럼]게임정책도 재미있어야 이긴다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

“3년 내내 벗기고 죽이고 돌리는 장면만 보다가 가는데 바뀐 게 없어서 우울하네요.”

게임 화면 선정성, 폭력 모사, 도박물을 걸러 내는 업무를 수행하다가 얼마 전 임기를 마친 어느 심의위원이 남긴 소회다.

정부 당국과 기업, 이용자, 학부모를 둘러싼 불신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청소년 보호와 사행 행위 방지를 미션으로 하는 기관이다 보니 유통되는 게임물의 부정적인 측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학부모도 아이도 게임사도 좋아하는 게임 정책을 펼치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세계에서 국법으로 게임판을 다스리는 민주 국가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10년 전의 게임법이 없던 시절은 평화로웠다. 게임이 효자 상품임이 알려지면서 게임 산업을 육성하는 전담 부서와 관련법을 만들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게임 산업은 그때부터 날갯죽지를 잃었다는 업계의 한탄도 들었다.

사행성은 줄줄 새고 창의성은 틀어막는 현재의 게임법은 망가진 필터와 같다. 게임물 심의를 하다 보면 자괴감이 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모든 '갑질'은 결국 '삽질'로 끝나기 마련이니 상식 회복만이 필터를 고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솔직해져야 한다. 힘이 빠지긴 했지만 대한민국이 아직도 게임 강국 소리를 듣는 것은 유명한 게임사나 질 좋은 게임이 많아서만이 아니다. 걸출한 게이머가 많고 열성 이용자층이 두텁다.

이런 이용자 주권 회복을 위해서는 아이를 사랑하고 게임도 사랑하는 학부모와 일선학교 교사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 경쟁과 불신으로 가득 찬 교육 환경에서도 게임에 몰두할 때 생기 넘치고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아이들을 보면 그저 미안하고 고맙다. 그들이 더 이상 이중 규범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숨통을 틔워 주어야 한다.

인디게임 개발자들이 끼와 창의성을 뽐내도록 멍석을 깔아 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노름으로부터 놀이를 구출하고, 둘째 규제와 진흥을 자로 긋듯 나누는 이분법 정책을 탈피하는 게 시급하다. 두꺼운 게임법에 누더기 규제를 덧입힌다고 해서 안전망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주요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게임 공약이 진취적이어서 기대가 크다. 게임판은 상상만큼 현실이 되는 마법의 영역이다. 정부가 미래에 점을 찍고 그 길을 마음 놓고 달려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모든 게임인의 바람이다.

어두움에 발목 잡힐까 염려하기보다는 밝은 에너지를 유도할 수 있는 매력 넘치는 게임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도 우리처럼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 긍정의 에너지를 모으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친 결과 게임은 가족 소통 플랫폼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큰일보다는 작고 소박한 이야기를 살려 내고 전문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립되길 바란다. “선생님, 왜 우리는 19금 게임을 하면 안 되나요?”라는 어린이 기자단의 질문에 “게임법에 그렇게 씌여 있어서”라고 말하는 실무자를 보면서 아연실색해 한 적이 있다.

21세기 기술로 22세기를 상상하는 아이들을 상대로 19세기 행정을 하는 것은 죄라고 규정했다. 과학 행정을 하자고 강조했다.

요즘은 “그 나이엔 우리 뇌가 아직 덜 성숙해서 더 중요한 것들을 소화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방해하면 행복이 줄어들거든요”라고 답변한다니 다행이다.

게임물 관리는 시민, 창작자들과 맨살을 대고 디지털 영토 전쟁의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매일매일 대응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정보들이 응집한다. 굳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허울을 쓰지 않고 이미 있는 리소스만 재배치해도 효과적이다.

정부가 할 일은 바로 이 리소스가 막힘없이 흐르게 하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범부처 간 협력으로 국가 간 게임 영토 분쟁 같은 큰 스케일의 해결사 노릇이 필요하다. 보스몹 레이드 하듯 함께 뭉치면 즐겁지 않겠는가. 재밌어야 이긴다.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 msyoh@gr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