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핵공학과 연구교수로 일하던 한국 청년이 있었다. 청년의 꿈은 고국의 인재를 전문으로 양성할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버드대 과학정책프로그램에서 꿈을 현실화시킬 작업에 착수했다.
'모든 개발도상국은 과학기술에서 발전 원동력을 찾는다. 이에 따라서 과학기술 교육은 경제 성장 추진력이 된다.' '두뇌는 도전받는 곳을 찾아간다. 후진국의 두뇌 유출 문제는 대학을 설립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가 작성한 논문 '개발도상국에서의 두뇌 유출 방지 방안' 내용이다.
청년은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존 해나 처장을 찾아가 한국에 대학을 세울 수 있는 600만달러 차관 지원을 약속받았다. 논문은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연구'라는 사업계획서로 발전했다.
청년의 꿈은 여러 번 위기를 겪었다. 고국은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에 소극 태도를 보였다. 당시 한국 과학기술의 중심축이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주미 대사, 미국 국제개발처 등 여러 경로로 사업 계획서를 전달했지만 무산되거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설립이 결정된 후엔 학계와 대립해야 했다. 기존 대학을 고사시키는 정책이라며 미국에 차관 지원 철회를 요청할 정도로 극렬하게 반발했다.
수많은 반대를 이겨 낸 힘은 청년의 확신이었다. 그는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보고서(일명 터먼보고서)' 마지막 장에 '미래의 꿈'이란 제목을 붙였다. 2000년에는 세계 명성의 훌륭한 기술 대학, 안정되고 자유로운 한국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돼 있을 것이라 단언하고 '한국은 모든 개도국에 자극과 희망을 주는 귀감이 될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보고서를 끝냈다.
이 이야기는 KAIST의 설립 비화다. 청년은 제 12, 15대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정근모 박사다. KAIST는 정 박사의 확신처럼 세계 대학으로 발전했다. QS 2018 세계대학평가 공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15위를 차지했고, 화학공학과 등 6개 전공 학과가 20위권 안에 들었다. 대학이 보유한 특허의 경제 가치나 경쟁력 등을 지표로 삼는 톰슨 로이터의 '세계 최고 혁신 대학 평가'에서는 2016년과 2017년 2년 연속으로 세계 6위, 아시아 1위에 올랐다.
현재 국내 산·학·연·관 리더급 인사 가운데 약 23%와 주요 기업 반도체 분야 박사급 인력의 약 25%가 KAIST 출신이다. 1450여개 창업 기업이 연간 매출 13조6000억여원을 창출하고 있다. 47년 동안 정부지원금이 3조1000억여원인 것을 고려할 때 KAIST는 창업기업 실적 한 분야에서만 봐도 투자수익(ROI) 측면에서 가장 성공한 정부 사업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비전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미래학자 토머스 프레이는 “현재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이 현재를 만들어 간다”고 했다. 대한민국이 KAIST를 통해 꾼 첫 번째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향한 두 번째 꿈을 키워 가야 할 때다.
이를 위해 KAIST는 설립 60주년인 2031년을 향한 새로운 비전을 수립했다. '글로벌 가치 창출 선도 대학'은 1년여 동안 학내 교수와 외부 전문가 등 143명이 머리를 맞댄 혁신 전략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내 수준의 가치를 창출하는 대학이었다면 다가올 세기엔 세계 수준의 학문, 기술, 경제, 사회 가치를 창출해서 세계를 선도하는 대학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KAIST는 오는 3월 20일 대전 본원에서 비전 선포식을 개최한다. KAIST가 두 번째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디디는 행사에 국민의 격려와 성원을 부탁한다. 인류의 행복과 번영에 기여하는 대학, 국민의 자부심이 되는 대학으로 성장해서 그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
신성철 KAIST 총장 president@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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