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는 올해 반도체 분야 신규 연구개발(R&D)에 단 한 푼도 배정하지 않았다. 반면에 중국 정부는 한국을 따라잡기 위해 반도체 산업 육성에만 10년 동안 170조원을 투입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메모리 가격 담합 조사에 착수했다. 안으로는 자국 기업 지원, 밖으로는 한국 기업 팔목을 비트는 중국 '반도체 굴기' 실체다.
파상 공세가 지속되면 반도체도 액정표시장치(LCD)나 발광다이오드(LED), 태양광처럼 중국에 시장 주도권을 내주는 것은 시간문제다. 전문가는 메모리 분야에선 '초격차'를 유지하고 장비, 부품 등 후방산업계와 팹리스업계 경쟁력을 높이는 '범부처 반도체 육성 전략'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4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분야에 배정된 정부 신규 연구개발(R&D) 예산은 0원이다. 한때 연간 1000억원이 넘는 R&D 예산을 투입하기도 했다. 정부 공무원 사이에서 '반도체는 잘나가는 산업'이라는 인식으로 매년 정부 예산을 줄이더니 올해는 신규 R&D 예산을 아예 배정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 '반도체 굴기' '보복성 조사',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 '무역 보복 압력'이 이어지자 관계 부처는 위기감을 느끼고 신규 예산 확보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각각 10년 동안 약 1조원씩 신규 국책 과제에 반영하는 예비타당성(예타) 조사를 신청했다. 지난달 말부터 기술성 평가를 받고 있다. 예타 조사는 총 사업비 500억원 이상, 국가 재정 300억원 이상이 소요되는 국가 R&D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타당성과 가능성을 미리 평가하는 제도다.
산업부는 상용화 중심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 사업, 과기정통부는 인공지능(AI)과 새로운 소자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연구 중심 개발 사업에 각각 초점을 맞췄다. 이달 말 양 부처 기술 평가가 끝나면 경제성을 평가한다. 시간은 촉박하다. 8월 말까지 평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내년도 예산안 심사에 접수도 못한다. 8월 말까지 평가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아예 통과조차 되지 못하면 내년에도 반도체 신규 사업 예산 제로 상태가 그대로 유지된다.
한 관계자는 “우리 경제를 떠받드는 반도체가 무너지면 한국의 미래는 암울하다”면서 “정부가 전향 자세로 이 분야 육성 의지를 보여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국은 이미 반도체 육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중국 정부는 2015년부터 10년 동안 국부펀드와 민간 사모펀드를 합쳐 1조위안(약 170조원)을 반도체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반도체 굴기 선언'이다. 시진핑 국가 주석도 나섰다. 최근 칭화유니그룹 산하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생산 라인을 찾아 “반도체는 사람의 심장에 해당한다”면서 “심장이 약하면 아무리 덩치가 커도 강하지 못하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을 상대로 메모리 가격 담합 조사에 나선 것은 표면으로 자국 스마트폰, PC 등 세트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가격 인하'를 유도하기 위해 실력 행사를 노골화했다는 것이다. 중국이 자국 메모리 산업을 키우기 위해 사전 견제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는 10년 동안 반도체에 170조원을 쏟아 붓는데 우리 정부가 계속 팔짱만 끼고 있다면 머잖아 반도체 분야도 추월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