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이미 황폐해진 국내 지능형반도체 시장은 재기할 동력을 얻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다.
우리나라는 D램과 낸드 등 메모리반도체 위주로 성장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선두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하지만 정작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각광받을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이렇다 할 차세대 기술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뛰어난 이 분야 전문기업도 부족하다.
국내 지능형반도체는 과거 팹리스(Fabless), 시스템반도체로 불리며 중소기업 주도로 시장이 형성됐다.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터치칩, 디스플레이구동칩 등 스마트폰에 필요한 제품군 중심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해외 유수 기업과 경쟁해야 하고 국내 대기업도 뛰어들어 전략적으로 육성하면서 우리 중소형 지능형반도체 기업은 설자리를 잃었다. 엠텍비젼, 코아로직 등 다수 지능형반도체 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했다. 현재 실리콘마이터스, 텔레칩스, 어보브반도체, 지니틱스 등이 각자 영역에서 기술 경쟁력을 갖춰 해외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5G, 인공지능, 사물인터넷(IoT), 딥러닝 등 비메모리 분야 기술이 절실하다. 이에 따라 세계 반도체 시장도 점차 '탈 메모리화'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계기로 지능형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예전부터 지능형반도체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세계 종합반도체 기업 순위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선두를 지키고 있지만 설계가 전문인 지능형반도체와 수탁생산형 파운드리 시장까지 고려하면 한국 경쟁력이 대만, 일본은 물론 중국보다 못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앤드류 노드 가트너 부사장은 현재 한국 반도체 산업을 '사상누각(built on sand)'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메모리반도체에만 치중해 지능형반도체 경쟁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2020년부터 메모리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충하고 브로드컴·퀄컴·NXP가 합병하면 삼성전자가 3위로 밀려날 수 있다는 가혹한 전망까지 있다.
세계 지능형반도체 기업이 약진하며 반도체 시장을 흔들고 있다. 엔비디아, 구글, IBM 등이 인공지능(AI) 시장 발전을 주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 분야 기업이 전무하다.
◇지원했지만 효과는 미비…어떤 해결책 필요할까
정부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지능형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기업 지원, 인력 양성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쳐왔다. 2014년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지능형반도체를 13대 미래성장동력 중 하나로 선정하고 이후 종합실천계획도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핵심기술 해외 의존도가 높고 전문인력이 부족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전문가들은 정부가 지능형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면 가장 기본이 되고 핵심적인 '인력양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동안 산업 육성, 창업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전문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을 선호하는 국내 취업 시장 분위기상 졸업생이 대기업에 몰리는데다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지능형반도체 기업에 취업하더라도 추후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경향이 강하다. 새로운 인력이 다시 지능형반도체 시장에 유입돼야 하는데 신규 유입 자체가 적어 우수 인력은 커녕 필요한 인력도 충분히 수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송용호 한양대 교수는 “대기업에 인재가 몰리면서 지능형반도체 분야에 인력 유입이 적고 인력 부족으로 성장 기회를 잃은 중소기업이 우수 기술을 개발하기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전문인력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고루 일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인력을 키워내도록 지원하는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국내 지능형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파운드리 사업을 강화하면서 다수 중소기업을 고객사로 유치하고 있어 과거보다 사업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고 평가받는다. 전에는 공정기술 격차, 적은 물량을 이유로 국내 중소기업이 파운드리에서 외면당했지만 최근 DB하이텍 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파운드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력이 취약했던 전력반도체 기술과 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육성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 신부가 1조원 규모로 공동 추진하는 '차세대반도체 기술개발사업'이 최근 예비타당성 조사사업을 통과했다. 7년간 1조원 이상 투입해 기존 반도체의 1000분의 1에 불과한 전력으로 1000배 성능을 내는 칩을 개 발하는 프로젝트다.
이와 별도로 고효율 전력반도체 파운드리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사업 도 추진하고 있다.
소품종 대량 생산 중심의 '패스트 팔로워'나 '퍼스트 무버' 전략에서 벗어나 다품종 소량 생산에 최적화된 '애자일(Agile)'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시장 변화에 맞춰 특정 요구사항을 목적과 결과에 두고 중간 과정과 접근을 시장에 맞게 변화·개선하는 개발 전략을 뜻한다.
이형수 전자부품연구원 융합시스템연구본부장은 “애자일 전략을 바탕으로 전력반도체, 5G, 인공지능 반도체를 설계하는 기업과 원천기술 IP를 확보해야 한다”며 “빠르게 시장에 대응하고 미래 반도체 분야에 과감하게 국가·사회·정책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
<송용호 한양대 공과대학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사람 없으면 성장기회도 없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앞서 나가려면 지능형반도체 기술 확보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력 유입이 너무 줄다보니 산업이 성장할 발판 자체가 없습니다. 가장 기본이면서 핵심인 전문인력 확보가 시급합니다.”
송용호 한양대 공과대학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국내 지능형반도체 산업이 심각한 인력 부족으로 성장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2016년 미래창조과학부가 주도한 국가지능형반도체추진단장을 맡아 지능형반도체 산업 성장 전략을 마련하는데 참여했다.
시스템반도체라고도 불리는 지능형반도체는 대규모 물량을 생산하는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 생산에 적합하다. 메모리만큼 미세 공정이 필요하지 않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 반도체 기술이 모두 필요해 난이도가 높다. 5G,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등 새로운 시장이 열리면서 지능형반도체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지만 국내 시장에서 성장하는 이 분야 기업이 많지 않다.
지난 수년간 삼성전자가 모바일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이미지센서를 중심으로 지능형반도체 사업 역량을 높였지만 국내 중소기업은 눈에 띄는 성장 기회를 잡지 못했다. 변동성이 심한 스마트폰 시장을 탈피해 자동차 등으로 영역 확대를 시도하고 있지만 녹록지 않다.
IC인사이츠 분석에 따르면 2017년 세계 상위 10개 시스템반도체 기업 순위에 한국은 단 한 곳도 들지 못했다. 대만 미디어텍(4위), 중국 하이실리콘(7위), 중국 유니그룹(스프레드트럼, RDA 포함)(10위)이 포함됐다. 이미 국내 지능형반도체 기술력이 중국에 뒤처진 지 오래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은 메모리반도체보다 먼저 지능형반도체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 주도로 대규모 투자를 해왔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반도체 예산이 줄어들면서 인력양성 사업도 함께 힘을 잃는 추세다.
송 교수는 “한국 반도체 대기업이 세계 1위를 하고 지능형반도체가 메모리반도체보다 더 중요해질 기술이라는 점을 모두 알고 있지만 여전히 '반도체는 대기업 사업'이라는 인식이 짙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이 잘 하는 분야에 왜 정부가 돈을 쏟느냐'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중소기업에서 기술 경험을 쌓은 전문 인력을 대기업이 흡수하더라도 다시 새로운 인력이 유입돼야 선순환이 되는데 현재는 신규 인력 유입 자체가 힘들다”며 “차세대 분야 특허 확보도 중요하지만 당장 인력을 유입할 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