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릭(Rubric). 라틴어 루브리카(rubrica)에서 왔다. 붉은색 잉크라는 뜻이지만 지시나 설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전에도 원고 수정 사항을 붉은색 잉크로 한 관행 탓이다. 이것은 훗날 교육학에서 학습자 성취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란 의미로 정착됐다.
어느 휴일 아침 휴대폰 전원을 켜자 딩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를 한 잔 끓여 놓고 열어 본 꽤 긴 메시지는 신제품에 어떤 기술을 개발해야 할지 묻고 있었다. 미국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기술 혁신과 전략 경영' 저자 멀리사 실링이 받은 질문도 같은 것이었다.
실링은 질문부터 정리해 보자고 했다. 제품은 여러 기술로 구성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기술보다 기능과 만족도가 관건이다. 기술 성능 대신 기능 만족도를 따져 봐야 한다.
난제는 이제부터다. 소비자는 어디서 만족을 얻을까. 당뇨 수치를 재는 혈당측정기를 생각해 보자. 수많은 속성이 있겠지만 비슷한 걸 묶어 보면 신뢰성, 편리함, 가격, 편안함이라는 네 가지 차원으로 귀결된다.
그럼 이 가운데 무엇을 개선해야 소비자 만족 최대가 될까. 간단한 루브릭을 하나 만들어 보자.
우선 네 가지 속성을 아래로 쭉 나열해 본다. 그 옆에 소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를 1점에서 5점까지 써 본다. 이때는 고객 의견도 중요하지만 혜안 있는 개발 담당자와 상의해서 제품 차별화 전략까지 담으면 좋다.
그다음은 개선 가능성이다. 잔고장이 많다면 신뢰성은 4점 내지 5점이 돼야 한다. 개선 여지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다음은 개선 용이성이다. 정확도는 지금 기술로 더 높이기 어렵다면 1점이나 2점이다. 측정 결과가 주치의 휴대폰에 자동 전송되는 기술이 별 어려울 것 없다면 4~5점을 줄 만하다.
여기까지 하면 결과는 간단히 나온다. 디멘션별로 중요성, 개선 가능성, 개선 용이성 점수를 합하면 된다. 실링이 찾은 혈당측정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편안함이었다. 하루 다섯 번 손가락 끝에서 채혈하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매번 피를 뽑아 측정하는 대신 체액에서 포도당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을 찾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9년 소니-필립스와 도시바-히타치 간에 콤팩트디스크(CD) 후속 기술을 놓고 한판 승부가 벌어졌다. 수성해야 하는 소니-필립스는 슈퍼 오디오, 절치부심한 도시바-히타치는 디지털다기능디스크(DVD) 오디오란 기술을 내놓는다. 그러나 의미 없는 싸움이 됐다. 소비자는 오히려 음질이 떨어지는 MP3의 편리함에 매료된다. 실상 이들 글로벌 기업이 자랑한 20㎑ 대역 음질은 보통 사람 청력으로는 구분조차 어려웠다.
글로벌 기업이 하나도 아니고 다 함께 왜 이런 실패를 하게 됐을까. 문제는 관행이 만든 함정이었다. 토머스 에디슨이 녹음장치를 처음 만든 후 이곳에서 기술 개발이란 더 나은 음질을 의미했다. 더 이상 소비자에게 의미 없는 것이 됐지만 기업들은 여기에 사활을 걸고 있은 셈이었다.
실링은 간단한 루브릭으로 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에 비견할 것은 아니지만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기 때문에 관우가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 이 답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