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조원대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사업'이 정치 외풍을 받아 산으로 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서로 클러스터를 유치하겠다며 이전투구하는 양상이다. 지역 국회의원이 기업을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반도체 초격차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한 클러스터 사업이 경제보다 정치 논리에 좌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31일 정계에 따르면 국회의원들이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를 자기 지역구 내에 유치하기 위해 기업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는 10년 동안 120조원을 투입, SK하이닉스와 장비·소재협력사가 입주하는 집적단지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천안을)은 전날 성명서를 내고 “SK하이닉스 천안 유치는 단순한 대기업 유치가 아니라 68만 천안 시민 삶이 바뀌는 일자리 창출이자 천안 가치를 높이는 경제 도약”이라면서 “이제 수도권 쏠림 현상을 타파하고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국민의 명령에 응답해야 한다. 반드시 SK하이닉스는 천안시를 붙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앞서 구미와 대구에 지역구를 둔 백승주·장석춘 자유한국당 의원, 김현권 민주당 의원실 측 관계자들도 SK그룹·SK하이닉스 고위 관계자들을 불렀다.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의 구미 유치에 대한 의견을 묻는 자리로 전해졌다. 정계 관계자는 “지역구 의원들이 기업을 불러 입지 선정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사실상 기업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쟁탈전은 지자체를 거쳐 국회로 번지며 과열되고 있다. 지금까지 지자체나 지역구 의원 등이 유치에 나설 뜻을 밝힌 지역은 용인, 이천, 청주, 구미, 천안 등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지역 이기주의 때문에 실제 클러스터 조성을 통한 반도체 경쟁력 강화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애초에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입지는 수도권 중심으로 고려됐다. 전력, 용수 등 인프라와 우수 인력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한 경제 관련 장관회의에서도 SK하이닉스의 수도권 투자가 안건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공급망을 구성하는 협력사들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팹이 집중된 경기권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구미 등 다른 지역에 클러스터가 조성될 경우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한 반도체 장비기업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기존 공장에 제품을 공급·관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는 어렵다”면서 “지역에 별도 지사를 설치하는 것도 부담이 크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반도체 부품 공급사 관계자는 “무리하게 지사를 설립하거나 이주를 하더라도 기반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은 비용 증가가 크게 우려된다”면서 “고객사부터 공급사까지 미래를 위해 힘들게 투자해야 하는 상황인데 최적 입지가 아닌 곳에 가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공장(팹)은 24시간 중단이나 오차 없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공정별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긴밀한 협력이 필수다. 1·2차 공급사는 수백에서 수천에 이른다. 그 가운데 한 곳에만 이상이 생겨도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최근 대만 TSMC는 감광액 이상 하나 때문에 웨이퍼 수만장을 폐기해야 하는 사고를 겪었다.
차세대 제품을 위한 연구개발(R&D)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업계는 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우수 인력 확보가 어려워지고, 기존 인력 이탈도 늘어난다고 입을 모은다. 동떨어진 곳에 클러스터가 조성될 경우 협력사는 물론 SK하이닉스조차 심각한 인력 문제를 겪을 공산이 크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는 중국 정부를 등에 업은 반도체 육성에 맞서 우리 기업의 반도체 생태계 체력을 길러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사업”이라면서 “경쟁력 제고가 아닌 지역 균형 발전으로 사업 목적이 변질될 경우 몇 년 안 돼 중국 반도체 기업에 따라잡힐 것”이라고 우려했다.
오대석기자 od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