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아돌프 아이히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 실무 책임자다. 종전이 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살았다. 그러나 1960년 5월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돼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된다.
1961년 아이히만 재판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시사주간지 뉴요커는 유대계 정치학자 해나 아렌트에게 취재를 부탁한다. 재판을 참관한 아렌트는 보고서에서 아이히만을 신념에 찬 나치이자 악에 물든 인간이 아니라 선악에 무감각해진 관료이자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훗날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을 뿐이라는 주장이 나왔지만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명제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기업의 성장은 왜 정체될까.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이 난제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원인이 다르면 해결책도 다를 수 있다는 데 있다.
더욱이 경영학자를 난처하게 하는 건 최고경영자(CEO)는 간단하면서도 즉답을 원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백가쟁명 뒤에 숨기는 쉬워도 세 가지만 말해 달라고 하면 실상 난처한 일이다.
'번영의 역설' 저자 에포사 오조모의 설명은 흥미로운 실마리를 준다. 그에게 기업 성장이란 크게 세 가지 과정이다. 첫째 그것이 신제품이든 기존 것을 개선한 것이든 더 좋은 제품을 만들면 된다. 둘째 효율 혁신(efficiency innovation)이다.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카테고리다. 나이지리아 출신 오조모는 이것을 비소비를 없애는 것이라고 말한다. '경쟁 기업과 경쟁하는 대신 비소비와 경쟁하라'는 명제로 잘 알려진 이것을 그는 아프리카 사례로 설명한다.
1998년 모 이브라힘은 셀텔을 설립한다. 아프리카에 휴대폰 이용률이 고작 2% 남짓했을 때였다. 잠재 고객은 많았지만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브라힘은 인프라부터 깔아야 했지만 7년 만에 13개 국가 500만 가입자를 모은다. 2005년 쿠웨이트 MTC가 인수할 무렵 셀텔 가치는 34억달러에 이르렀다. 불모지가 무주공산이 된 셈이었다.
톨라람이란 기업도 한번 보자. 1988년 나이지리아에서 인스턴트 누들, 쉽게 말해서 라면을 팔자고 든다. 인구의 80%가 하루 2달러로 사는 극빈국에 가능키나 할까. 그러나 지금 공장 13개, 직원 5만명에 수만개 소매점과 유통망을 거느린 기업이다.
오조모는 뜬금없이 헨리 포드를 불러들인다. 그의 말로는 120년 전 포드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자동차는 지금 개인용 헬리콥터 격이다. 1000달러 아래로 맞추자니 시카고 도축장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가져왔고, 제철소를 지었다. 그다음은 유리공장과 철도회사였다.
아렌트는 훗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 책에서 그녀는 악이 근본인지 자의식 명령에 따르는 나태함의 산물인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결국 수동이고 자의식 없는 안이함을 악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어쩌면 혁신도 마찬가지다. 혁신의 가장 큰 걸림돌도 나태함과 무관심일지 모른다. 결국 '정체의 평범성(Banality of stagnation)'에 우리는 빠져 있는 셈이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