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7월 1일 일본 정부의 3대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 이후 국내 소재부품 산업계의 국산화 현황, 문제점, 대안을 살펴보는 '소재부품 국산화, 다시 시작하자' 시리즈를 총 9회에 걸쳐 게재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를 비롯해 배터리, 기계·로봇, IT기기, 나노, 화학소재 등 현황을 점검하고 정부 정책 방향을 짚었다.
일본 조치 이후 약 한 달간 소재부품 국산화와 공급망 다변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에 산·학·연·관 전문가와 함께 우리 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결산 좌담회를 마련했다.
[참석자(가나다순)]
△김창균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직무대행
△백만기 산업통상자원 R&D전략기획단장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이신두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사회=양종석 전자신문 미래산업부장
◇사회(양종석 전자신문 미래산업부장)=핵심 소재부품 국산화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현재 상황에서 국산화 필요성과 의미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백만기(산업통상자원 R&D전략기획단장)=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산업은 국제정치적 함의가 있는 분야다. 국제정치 변화에 따라서 첨단산업 프레임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일본·미국·유럽이 자유민주주의 우방이란 점에서 전혀 규제 없이 우리 나름의 비즈니스 모델을 자유롭게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에 소재부품 국산화를 다시 봐야 한다. 과거에 당연했던 것도 이젠 수출·무역규제가 생겨서 예전 방식으로 국산화를 편안하게 추진할 수 없다. 위기 상황을 기회로 활용한다면 우리 산업 뿌리가 좀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안기현(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지금 반도체 업계가 당면한 문제는 '수급'이다. 현장에선 국산화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국산화는 많이 언급되지만 이미 20년 전부터 국산화를 시도해왔다. 그럼에도 미진했던 이유는 그동안 반도체 제조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했기 때문이다. 후발주자격인 우리 소재·장비·부품 업체가 제조 기술 발전 속도를 못 따라올 정도였다.
국산화 이슈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지만 치밀하고 면밀하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갑자기 계획을 세워 급하게 하면 안 된다. 글로벌 시장 관점에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해야 한다.
◇이신두(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정부 연구개발(R&D) 사업에서 우리 희망사항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가 수만가지 소재를 다 개발할 수는 없다.
이번 일본 수출 규제는 IT기기 완성품을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소재들을 틀어막았다. 한국이 잘 나가는 산업의 핵심을 찌르면 타격이 올 수밖에 없다.
아직 우리나라에 소재·부품 기술이 얼마나 축적돼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 가능성조차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국산화를 외치는 것은 안 된다. 최근 정부가 추가경정예산 2700억원 정도를 들여 국산화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돈으로 될 문제가 아니다. 전략과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김창균(한국화학연구원장 직무대행)=일본 규제 이후 언론 등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소재 수요기업 협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글로벌 기업이니까 세계 최고 기술의 소재를 써야 최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필요한 소재 구체 사양을 국내 업체에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기존 글로벌 기업과 비밀 협약을 맺고 거래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비상식적인 규제를 하자 국산화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기술 격차가 커진 소재를 이제 개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미 글로벌 선두기업이 촘촘하게 마련한 특허에 다 걸린다.
기존 소재를 개발해서 추격하지 말고 미래 소재를 우리가 먼저 개발해 선점하고 특허 장벽을 만드는 방향이 돼야 한다.
◇사회=과거에도 소재부품 국산화 필요성은 줄곧 제기됐다. 국가 정책도 있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업도 논의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
◇백만기=과거 국산화 전략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제한된 재원을 기업에 골고루 나눠주는 개념이었다는 점이다. 당장 경제성이 없더라도 가장 중요한 분야에 쓰일 수 있는 대체재를 마련하는 전략이 부족했다.
이제는 정말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반도체가 '초격차'인 만큼 이것이 깨지지 않을 수 있는 국산화 전략이 나와야 한다.
또 완성품을 만드는 대기업과 소재를 만드는 중소기업 간 협업 체제가 좀 더 강력해야 한다. 과거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정부가 함께 노력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동안은 최근 같은 비상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시장 기능에 맡겨뒀다.
기업은 영업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기업도 중장기로 국산화가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지만 단기 영업이익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단기 이익과 중장기 이익을 조화롭게 이루려는 CEO 의지와 경영 노력이 필요하다.
◇안기현=국산화가 더딘 가장 큰 원인이 산업계에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 그러나 글로벌 관점에서 봐야 한다. 반도체는 국내가 아닌 세계시장 중심으로 기술이 발전했다. 국내보다 세계시장 발전 속도가 빠르다보니 기술 격차가 좁혀지지 않거나 개선이 미진했다. 그나마 대기업이 국내 후방기업 협업에 신경 쓰고 정부가 투자했기에 반도체 기술 격차가 유지된 것이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기업도 국산화 노력을 많이 했다. 반도체 제조기업이 먼저 생긴 다음 국내 소재·부품·장비기업이 후발주자로 뛰어들었다. 그러다보니 규모가 작은 기업이 많다.
협회에서 기업 간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장비·소재·부품 기업 관심이 부족해 아쉽다. 전·후방 기업이 함께 해야 할 일인데 공동체 의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신두=정부는 많지는 않지만 소재원천개발사업 등 끊임없이 산업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사업 안에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업 종료 후 파급력이 어땠는지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이다. 세밀한 정책 수립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정부 R&D 예산은 국책사업의 궁극적인 목표와 현실 간 미스매치가 발생했다. 중소기업은 원하는 과제 내용을 우선 제출하고 과제가 도출되면 가져가기 바쁘다. 정부는 확보한 예산을 다 소진해야 하니 나눌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은 정부 R&D 투자 금액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금력이 부족하고 기술력이 빈약하다. 정부 지원금 확보가 국가 산업을 위한 일이기보다는 생존 문제로 작용했다. 게다가 '소량 다품종'인 부품산업 특성상 영업이익이 많을 수도 없다. 투자 자금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결국 정부는 예산을 지원해도 이렇다 할 결과가 안 나오고 기업은 수입대체 효과를 보려고 국내 부품 테스트를 하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안 나오는 현상이 반복됐다.
◇백만기=덧붙이자면 국가 R&D할 때 중소기업은 지원하고 대기업은 배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큰 것도 문제다. 소재를 잘 개발할 수 있는 곳을 성역 없이 선택해야 한다. 중소기업 위주로만 지원하면 투자해도 결과가 미진할 수 있다.
◇김창균=예전 산업통상자원부 R&D 과제를 살펴보면 대기업도 과제를 수행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이 소재부품 중요성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수요기업에 대기업이 참여해서 기획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소재부품을 국산화할 때 대기업이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 힘들다. 대기업이 글로벌 수준에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소기업 제품을 쓰지 않으면 중소기업은 망한다. 그동안 투자한 게 사라진다는 얘기다.
이제 소재기업도 '퍼스트 무버'가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 영업이익이 있어야 연구개발도 하고 인력도 뽑을 수 있다. 대기업 도움이 필수다.
◇사회=소재부품 국산화의 과거와 현재 흐름을 짚어봤다. 산·학·연·관 각 관점에서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소재산업 성장을 도모해야 할지 궁금하다.
◇백만기=우리 산업은 기업별 수직 계열화가 만연하다. 소재 산업 규모를 키워서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장비·부품 줄세우기로 많은 기업이 희생됐고 같은 노력에도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적어도 소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키워나가면서 한 품목에서라도 대형 기업을 만들자는 공감대가 필요하다. 기업 내부에서 결단이 필요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일방적이 아닌 수평적 협력 구조를 만드는 노력도 필요하다. 일례로 전략기획단은 각 기업 간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들어서 산업분야별 데이터를 공유하고 신제품 개발을 도모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 이런 접근이 더 필요하다.
소재는 다품종이다. 모든 소재 연구개발을 한 번에 모으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서 함께 키워나가는 공감대가 필요하다. 전략적으로 육성할 소재를 확실히 잡아나가면 인근 분야로도 확산할 수 있다. 국제 위상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규모가 커진 산업 중심으로 분야를 계속 확장해 나가는 소재개발 전략이 있어야 한다.
◇안기현=소재기술 독립과 소재산업 육성은 다른 얘기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소재산업 독립을 도모하고 산업 자체 성장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소재산업이 성장하려면 국내 시장에서 머물면 안 된다. 세계시장에 진입해야 한다. 특허 문제가 없거나 가격 이슈가 큰 것은 국산화가 가능하다. 대기업도 채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 문제는 '최첨단'이냐다. 퍼스트 무버가 돼야 산업 자체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최첨단 기술은 산업 일선 기술로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인 기초과학부터 해야 한다. 학교와 연구소 인력이 많아지고 프로젝트가 늘어나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서 주도해야 한다. 이는 절대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다. 긴 호흡으로 봐야 세계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밸류 체인은 꽉 묶어놓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종속되면 절대 첨단기술 국산화를 성공할 수 없다. 파트너십을 맺고 세계 시장으로 진입해야 한다. 여기서도 물론 기초과학 발전이 전제돼야 한다.
◇사회=기초과학 기술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고 대기업 역할도 분명히 크다.
◇안기현=글로벌 반도체·디스플레이 선두 기업이 모두 한국에 있다는 것은 국내 소재기업에 상당히 유리한 환경이다. 일본 소재산업이 성장한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세계시장을 일본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이 주도했기에 가능했다. 세계적인 자국 기업을 테스트베드로 삼아 성장했고 결국 글로벌 소재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수출을 규제하면 일본 기업도 피해를 입는다. 한국만큼 좋은 테스트베드 환경을 갖춘 곳이 어디 있나.
◇이신두=대기업이 자체 보유한 파일럿 라인에서 소재 특성을 평가하려면 상당한 비용과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 대기업도 감당하기 부담스럽다. 그래서 국가가 전문 평가센터를 만들고 전략 소재를 모듈별로 테스트할 수 있도록 조성해야 한다. 추경으로 소재부품 지원 예산을 편성한다는 데 당장 단기 효과가 나오기는 힘들다. 장기 안목으로 추진할 사안이다.
제조업은 일자리를 가장 많이 창출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주력 제조산업이 세계 1등으로 성장했고 일자리 창출 효과도 누리고 있다. 경쟁력을 잃는 순간 수비수 없는 축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돼버린다.
◇김창균=글로벌 수준의 우리 소재기업을 반드시 육성해야 한다. 정부 도움으로 연구개발하고 있지만 연구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 국내에서 합성 분야는 3D 업종으로 인식될 정도로 취약해졌다. 시간 투자가 많이 필요하고 위험성도 있어서 합성 전문가가 없다. 전통 학문을 잘 안 하는 경향이 짙다.
대학에서 이공계를 전공해도 정작 졸업생이 이 분야에 안 오는 것도 문제다. 이공계에 진학해도 졸업하고 나서 다른 분야를 전공하는 사례가 많다. 이런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사회=국가 정책으로 기초과학을 키울 필요성이 커 보인다.
◇백만기=우리 과학기술 정책은 유행에 너무 치우친다. 어느 부처든 다 유행에 맞춰서 정책을 만든다. 겉으로 보이는 정책에 치우치다보니 모든 부처가 비슷한 정책을 전개한다. 이것은 예산을 제대로 쓰는 방식이 아니다. 근사한 제목이 아니면 예산이 안 나오는 게 현실이다.
지방대에도 우수한 교수가 많다. 이들에게 안정적으로 연구비를 지원해서 사람을 키우고 기초 기술을 단단하게 다지는 연구개발이 필요하다.
감사원·국회도 과학기술 투자 마인드를 함께 가져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관리·감독하는 부서, 예산 부서가 눈에 보이는 정책 중심으로 일하다보니 차분하게 5년, 10년 지속하는 정책이 없다. 정작 우리가 필요한 인재는 이런 분야에서 나온다. 결국 기본이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초과학이 흔들리고 소재산업 역량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안기현=정부는 항상 성과 중심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에서 '성과'는 아웃풋이 아닌 '인풋(투입)'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기업은 투입된 그 성과를 바탕으로 제품을 산업화(아웃풋)한다. 정부가 자꾸 아웃풋만 보고 인풋을 계산하니 투자를 못한다.
기업은 필요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새로운 소재가 필요하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으러 다닌다. 문제는 국내에 풀(POOL)이 없다. 누군가 연구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기반이 매우 약하다. 기반이 없으면 지속성도 없어진다. 학교와 연구소가 많이 연구할 수 있도록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다양하고 지속성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신두=우리나라에 세계 최초, 국내 최초라는 연구 논문이 엄청나게 많다. 그 중 과연 몇 개나 산업화·실용화됐나. 연구 내용이 실제 시장에 등장해야 진짜 퍼스트 무버 아닌가.
학문 결과가 실용화 연구로 이어지는 맥이 끊겼다. 국책 연구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전체 연구 시기별로 나눠서 컨센서스를 이뤘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대학 연구 결과를 받아서 국책 연구소가 5~7년, 이후 기업이 3년 정도 연구를 이어가며 최종 상용화하는 방식이다.
◇안기현=전적으로 동감한다. 소재 산업에서 가장 필요한 게 국책연구소인데 현재 가장 취약하다. 기술 흐름이 대학→국책연구소→대기업으로 가야 하는데 가교 역할을 하는 국책연구소 역할이 끊겼다. 기업은 산업기술을 연구하고 대학은 연구논문을 쓰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학과 기업을 잇는 국책연구소 역할이 절실하다.
◇김창균=국책연구소는 1970년대 후반에 만들어져서 기업이 원하는 연구 중심으로 수행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기업을 직접 도와주는 연구를 못 하게 됐다. 지금은 퍼스트 무버형 연구만 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연구 인력이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환경이 심각하다. 연구원 인건비를 연구비에 포함시켜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Project-Based System)가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해쳤다. 연구원이 급여를 받기 위해 외부에서 과제 확보 영업을 해야 한다. 정부가 적어도 PBS 75%를 보장해주고 필요한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하게끔 해야 하는데 현재 크게 못 미친다. 연구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신두=각 연구소는 저마다의 고유 역할이 있다. 과제 영업이 중요해지다보니 새로운 프로젝트가 뜨면 모든 연구소가 참여하려고 달려든다. 고유 역할이 실종됐다.
이번에 소재부품 분야에 배정되는 추경 예산을 활용해 PBS 100%를 보장하는 '반도체소재사업단(가칭)'을 만드는 시범사업을 제안하고 싶다. 사업단 소속 연구원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하고 PBS가 연구활동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도 함께 알고 싶다. 무엇보다 정말 연구자가 마음껏 연구하는 생태계를 조성해보면 어떨까.
◇사회=연구 단계별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과 테스트베드가 정말 중요하다. 기업 외부에 테스트베드를 만들어 활용하는 방안도 있지 않나.
◇김창균=해외에는 IMEC이라는 기업 공동 반도체 연구소가 있다. 여기서 세계 반도체 소재·장비기업이 돈을 내고 테스트베드를 활용한다. 국내 대기업 테스트베드는 계열사에는 오픈되지만 외부 기업이 사용하기는 힘들다.
국내에도 기업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6개 나노팹이 있다. 문제는 정부가 장비를 구매하고 유지보수를 사업단이 자체 해결하도록 만든 구조다. 정부가 유지보수를 하고 기업이 일부 장비를 채워 넣는 형태가 돼야 한다. 테스트베드가 전국 여기저기에 산재한 것도 문제다. 중앙집중형으로 조성해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이신두=나노팹은 투자해놓고도 질타 받는 사례다. 정부는 거액을 들여 장비를 사놨더니 왜 활용을 못하냐고 따진다. 정작 중소기업은 제대로 설비를 활용해 테스트하기 힘들다. 다 만들어놓고 잘 사용해보라고 하지만 자립이 힘든 게 현실이다. 국가 산하기관처럼 인력이 상주하고 각 기업 연구원이 테스트하고 정부가 용역을 줘서 운영하는 형태여야 한다.
◇백만기=반도체 소재·부품은 산업, 기술, 정책 전문가가 모두 함께 연구해야 하는 분야다. 1970년대에는 산업-기술-정책이 연결돼 각 연결고리 역할을 연구소가 했다. 하지만 점점 연구소가 산업과 멀어지게 됐다. 정부도 산업부, 과기부, 중기부 등이 따로 일하면서 연결이 안 되고 있다. 각 부처가 다 비슷해졌고 산업정책과 과학기술정책 간 연결고리가 상당히 약해졌다.
이번 기회에 산업부가 산업전략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힘을 실어줘야 한다. 유관 기관이 유기적으로 일하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 그래야 연구소도 산업과 바로 접점이 생기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사회=지금까지 발언을 토대로 살펴보면 결국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차세대 소재 선점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기반이 있어야 연구할 수 있다.
◇김창균=기초 연구는 금액이 적더라도 긴 기간 동안 수행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장기 대형 사업을 추진할 때는 사업단이 목적에 맞게 기획되고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간혹 기초·응용연구 목적으로 시작한 사업이 중간에 목적이 바뀌어서 기업과 연계해 평가하는 사례가 있다. 수요기업이 첫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등 제대로 계획해야 한다.
출연연이 완료한 연구를 기업이 받아가지 못하는 문제도 생긴다. 출연연이 연구를 다 수행하고 마지막 단계에 기업이 함께 연구에 참여할 기간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기업이 가져갈 수 있는 연구를 기획해야 한다.
최근 정부가 이어달리기 연구개발 지원을 하는데 기획 첫 단계부터 이런 점이 반영돼야 한다. 중소기업 맨파워가 약해도 기술을 받아갈 수 있도록 출연연이 기술이전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요기업이 원하는 스펙에 들어맞게끔 밀착 지원해야 한다.
◇안기현=우리 소재산업이 퍼스트 무버를 지향한다면 최근 불거진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문제, 소재 국산화 등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 단 선진형 연구개발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우리는 산업기술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돼 있다. 산업기술뿐만 아니라 기초연구, 목적연구가 함께 균형 발전해야 진짜 우리만의 기술이 될 수 있다. 산업기술 경쟁력은 강하지만 목적연구를 하는 연구기관이 가장 취약하다.
소재산업 육성에 문제 의식이 있다면 이제 연구소와 대학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힘을 실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산업이 강해질 수 있다. 연구개발 체질을 바꾸고 시야를 넓혀서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
◇김창균=국내 중소기업 맨파워가 상당히 약하다. 출연연 연구자의 근무 정년을 늘려주거나 중소기업에 가서 일할 수 있는 정부 지원이 있었으면 한다. 정년퇴직을 앞둔 연구자 중 상당수가 중소기업의 기술력 향상을 돕기를 원한다. 현재 우수연구원 제도는 일부만 정년 61세를 넘어 65세까지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으며 일할 수 있다.
연령대가 있는 연구진은 중소기업과 의사소통을 쉽게 할 수 있는 게 강점이다. 젊은 연구자는 새로운 연구에 대한 갈망이 큰 편이어서 중소기업이 원하는 것과 지향점이 다른 사례가 많다. 연구 경험이 풍부한 연구진은 출연연 기술이전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
◇사회=일본 정부가 한국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를 결정했다. 추가 규제 품목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일본과 갈등이 중장기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 기업이 앞으로 어떤 전략으로 이런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까.
◇김창균=단기로 해결하기 쉽지 않다. 소재부품은 수입처 다변화, 확보 물량을 적소에 사용하는 방법을 꾀해야 한다. 장비는 미국·독일로 수입처를 다변화하는 방법이 있다.
중장기 측면에서는 소재부품 국산화가 이뤄지면 좋지만 특허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그래서 차세대 소재부품 개발을 중점 지원해야 한다. 중소 벤처기업은 정부출연연과 대학 인력을 매칭해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출연연 정년을 복원해 복원 기간 동안 고경력 노하우를 기업에 지원하는 방식의 정부 지원을 제안하고 싶다. 중소 벤처의 열악한 자본·인력 현실을 고려해 특허 분석 등 지원도 반드시 필요하다. 소재·부품·장비 전 영역에서 수요기업과 긴밀한 협조가 이뤄져야 한다.
◇백만기=이제는 정말 제조 대기업과 소재·부품 중소·중견기업이 한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 제조혁신을 위한 플랫폼을 공유하고 상생하는 한국형 신성장 모델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이런 플랫폼 모델을 적극 장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소재부품 산업이 단순히 국내 시장만 겨냥하지 않고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 분야에서 진정한 '히든 챔피언'이 나올 때까지 정권 변화와 무관한 산업 정책을 추진하는 게 절실하다.
◇이신두=일본과 신뢰가 회복하지 못할 수준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염두하면 국내 자체수급 대책 마련, 해외 글로벌 기업의 국내 생산기지 유치 필요성이 커진다. 국내 개발과 자체 공급은 공급사와 수급기업 간 긴밀한 공조체계를 구축해 양산 능력을 지속 높여야 한다. 특히 소재 공정성능 평가를 위해 국가적인 평가센터 구축, 인증제도 시행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해외 글로벌 기업의 국내 유치는 연구소 수준이 아닌 국내 소재기업과 공동 개발·생산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법·제도로 뒷받침해 실질적인 공동 연구개발을 해야 한다. 원천기술 특허, 지식재산권, 합작 등 구체 시행 방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글로벌 기업이 국내 생산기지 구축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참여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우리 산업환경이 글로벌 수준에서 얼마나 기업 친화적이며 정부와 기업이 제시하는 조건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도 다시 살펴야 한다.
정리=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