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7일 수출규제 조치 이후 처음으로 기업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기술력이 한나라를 먹여 살린다. 당장 어려움은 있지만 길게 보고 우리 산업 생태계를 바꾸는 기회로 삼아나갔으면 한다”며 정부 지원을 약속했다. 중소기업을 위한 병역 특례제도 강화도 언급, 힘을 보탰다. 국산화 기술 개발에 성공한 기업을 찾아 직접 격려하고 정부지원책을 보강해 대일 수입 의존도를 낮추는데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밀제어용 감속기 전문기업 에스비비(SBB)테크를 찾아 “일본이 우리나라를 백색국가에서 배제하면서 우리 부품·소재 기업 특히, 강소 기업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은 최근 국방부의 전문연구요원 감축 움직임 관련해 “병역 자원 때문에 전체적으로 늘릴 수 없을 것”이라면서도 “가급적 중소기업 쪽에 많이 배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SBB테크는 눈앞의 것만 보지 않고 기술 자립을 도모했다”며 “노력의 결실로 세계에서 두 번째 정밀 제어용 감속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해서 로봇 부품 자립화를 기반 만들었고 우리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에도 큰 힘이 되고 있다”고 격려했다.
문 대통령이 방문한 SBB테크는 일본 의존도가 높은 기계·로봇 산업에서 독자 기술력을 갖춘 업체다. 1993년 설립된 이후 특수 정밀 구동 부품 전문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기계에서 회전·직선 운동을 지지하는 축 역할을 하는 특수 환경용 복합 베어링을 주로 생산·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로봇 액츄에이터(구동장치)와 감속기 등 제품도 생산한다.
현재 로봇용 감속기 자체는 일본 전략물자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감속기 핵심 부품인 베어링은 전략물자에 해당된다.
회사는 2017년 로봇용 감속기를 국산 기술로 양산하면서 주목받았다. 감속기는 기어를 활용해 속도를 떨어뜨리는 부품이다. 작고 가볍고 정밀한 '하모닉 드라이브'와 정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힘이 좋은 '사이클로이드 드라이브(RV)' 감속기로 나뉜다. 로봇·기계 움직임을 조절하는 데 쓰이는 핵심부품으로 일본 업체가 세계 시장을 '반독점'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큐와이리서치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세계 하모닉 드라이브 시장은 일본 하모닉드라이브시스템즈(HDS)가 73.3%를 차지했다.
이어 일본 니덱-심포가 11.2%, 중국 리더드라이브가 11.1%로 뒤를 이었다.
사이클로이드 드라이브 시장도 일본 나브테스코가 세계 시장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BB테크는 감속기 중에서도 일본 업체 점유율이 높은 '하모닉 드라이브'를 생산한다. 2009년 부품을 개발한 이후 2017년 부품 양산에 성공했다.
류재완 SBB테크 대표는 “로봇용 감속기는 10년 가까이 개발해 2017년 제품을 처음으로 양산했다”며 “국내 중소기업과 방산 업체를 중심으로 감속기를 공급했고, 최근 국내 대형 로봇업체에서도 SBB테크 감속기 샘플을 테스트하고 있다”고 말했다.
SBB테크는 기계 베어링 분야에서도 독자 기술력을 갖춘 업체다.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장비, 정밀기계 장비에 쓰이는 특수 환경용 복합 베어링 생산 기술을 갖췄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열처리강을 감속기로 만드는 '형상가공-조립-성능·품질검사 공정'을 차례로 둘러보고 SBB테크 관계자로부터 각 생산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어이진 임직원 간담회에서는 애로사항과 건의사항을 직접 청취하고 각 부처에서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적극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지출이 세계 1위다. 지출을 중소기업쪽에 더 배분해야 한다”며 “이 국면에서는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쪽에 배분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중소기업이 개발한 제품에 대해 품질 검증을 공인해주는 제도 마련도 당부했다.
정부는 일본 수출규제조치 발표 이후 국내 로봇제조 기업과 성능 및 신뢰성 평가를 추진하기로 했다. 추가경정예산으로 자금 지원과 수요기업 연계 등으로 조기에 대규모 양산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로봇 분야 강국인 일본에서 이 분야를 타깃으로 추가로 수출을 제한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계·로봇 산업에서 국산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계 산업은 '제조를 위한 제조장비'로 불릴 만큼 전후방 산업에서 큰 영향력을 차지한다. 이와 함께 로봇 산업은 4차 산업혁명과 맞물려 세계적으로 성장세가 가파른 분야이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대구광역시에서 열린 '로봇산업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2023년 로봇산업 글로벌 4대 강국을 목표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두 산업 모두 대일(對日) 의존도가 특히 높은 분야여서 국산 기술 개발이 시급하다. 산업부가 지난 5일 공개한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진단'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우리나라 기계산업 자체 조달률은 61%에 불과하다. 기계 수치제어장비(CNC) 등 핵심 부품을 일본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에서 5월까지 일반기계 분야 수입액 120억3600만달러 중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26억8000만달러(22.3%)다.
로봇 산업도 일본 의존도가 높다. 산업부와 한국로봇산업진흥원, 한국로봇산업협회가 조사한 '2017 로봇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로봇 단품·부품 수입액 7450억원 중 3918억원(약 52.6%)은 일본에서 수입한다.
제조업용 로봇으로만 한정하면 전체 수입액 4621억원 중 3148억원(약 68.1%)을 일본이 차지했다. 현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성현희 청와대/정책 전문기자 sunghh@etnews.com, 변상근기자 sgb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