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한 달 만에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와 에칭가스 국내 업체 공급을 승인했다. 국제사회 생색용이라는 의견과 일본이 한발 물러선 것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업계는 일본의 의중을 판단할 수 없다며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맞대응에 숨을 고르는 모양새다. 8일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에 대한 3대 품목 수출 규제를 시작한 지 35일 만에 EUV 포토레지스트와 에칭가스 수출 품목을 허가했다. 두 소재 모두 삼성전자로 수급된다. EUV 포토레지스트는 삼성전자 EUV 공정이 도입된 화성사업장, 에칭가스는 중국 시안 공장으로 각각 향할 공산이 크다.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수출 허가가 나면서 업계는 '우선은 한숨 돌렸다'는 분위기다. 다만 일본의 의중 파악에는 의견이 갈렸다.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한국의 국산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일본 기업에도 피해가 간다는 분석이 일본 정부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EUV 포토레지스트 시장 물량의 90%는 일본이 생산하지만 한국에서 30~40%가 소비된다는 점을 고려해 일본 기업을 보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분석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일본이 당초 계획을 조정하면서 오히려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에 대한 협의를 하자고 압박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국의 소재·부품 국산화에 반응했다기보다 일본 측이 자국의 명분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반면에 일본의 노림수가 연말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한 업계 관계자는 “마냥 반길 일은 아니다”면서 “수출 규제를 완화할 거면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조치 철회까지 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장이 갈리지만 사태를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의견은 대체로 동일하다. 한 장비업체 관계자는 “한 번의 규제 완화로는 판단하기 어렵다”면서 “규제 품목 추가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일본 규제가 완화된다고 해서 국산화가 유야무야된다면 미래에 똑같은 일을 또 당할 수 있다”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수출 규제 완화 움직임을 보였지만 국산화 등 자체 노력에 신경 쓸 방침이다. 이낙연 총리는 이날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 모두발언에서 “일본이 수출 규제 품목의 하나인 EUV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을 처음으로 허가했다”면서 “우리는 일본의 경제 공격이 원상 회복되도록 외교적 노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일본 정부의 속도 조절에 맞춰 사태를 지켜보며 숨을 고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수출 승인에 관해 “일본이 우리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이에 대한 대응 카드로 일부 제품은 허용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한국에 의도적으로 불이익을 주려는, 즉 무역 보복이 아니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조치인 것 같다”고 해석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전략물자수출입고시' 개정을 유보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8일 열린 관계장관회의에서 전략물자수출입 고시 개정에 관해 논의했지만 세부 내용이나 시행 수준과 시기에 대해서는 조율이 필요하다고 결론냈다”면서 “최종 발표안과 입법 예고 시기는 추후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양국 간 갈등이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을 두고 우리나라가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배제하는 등 맞대응은 자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효영 국립외교원 경제통상연구부 교수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배제하는 것은) 맞대응으로 가겠다는 것인데 실제 시행할 경우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는) 국제사회 여론전 전개에 자충수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백색국가 배제에는 신중함이 요구된다”고 충고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변상근기자 sgbyun@etnews.com, 성현희 청와대/정책 전문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