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화웨이가 미-중 무역분쟁 장기화에 대비하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화웨이는 반도체 수급을 막으려는 미국 정부의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공급망을 점검하고 대체 기술 찾기에 나선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화웨이의 점검 대상에는 우리나라 반도체 관련 기업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화웨이가 국내 반도체업계에 사업 확장의 기회가 될지 격화하는 미-중 갈등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는 불똥이 될지 향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화웨이는 자사 공급망에 있는 협력사를 대상으로 미국 기술 사용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조사는 지난 5월 미국 상무부가 자국 기술을 이용해 반도체를 만들어서 화웨이에 공급할 경우 해외 기업도 제재하겠다고 발표한 뒤 이뤄졌다. 화웨이는 반도체 장비 협력사까지 조사 대상에 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반도체 장비에 미국 기술이 사용됐는지 여부를 파악하고 있다.
화웨이는 반도체를 직접 만들지 않는다.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나 모뎀 등을 설계하지만 생산은 TSMC, SMIC와 같은 파운드리 업체에 맡긴다. 반도체 제조 공장이 없는 화웨이가 반도체 장비까지 미국 기술 사용 여부를 조사하는 건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살펴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화웨이는 또 최근 복수의 국내 반도체 장비 회사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웨이 한국법인 직원이 장비업체들을 찾았다. 방문 이유와 자세한 논의 내용 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시기와 최근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의 반도체 제재와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산 장비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에서 한국 장비를 찾았을 것이란 관측이다.
화웨이는 지난해부터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견제를 받고 있다. 미국 정부는 안보 위협을 이유로 지난해 5월부터 화웨이가 퀄컴 등 미국 반도체 부품과 장비 등을 사들이기 어렵게 했다.
화웨이는 자회사 하이실리콘(하이쓰반도체)을 통해 AP나 모뎀을 자체 설계하고 대만 TSMC 등에 맡겨 생산하는 방식으로 제재에 대응했다.
그러자 미국은 지난달 해외 기업도 화웨이에 반도체를 납품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추가 제재안을 마련, 압박 수위를 높였다. 미국 반도체 기술이 반도체 설계 및 제조 분야에 핵심으로 쓰이고 있어 이를 통해 화웨이를 견제하려는 포석이다. 미국의 견제 이면에는 중국의 첨단 기술 분야 진출을 막거나 지연시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 기술을 이용해 화웨이용 반도체를 만들 경우 당국의 승인을 받도록 한 미국의 규제는 오는 9월부터 시행된다. 이 경우 화웨이는 TSMC 등 해외 파운드리를 이용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화웨이는 규제 시행 전 또는 반도체 재고가 소진되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며 대체 솔루션 마련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화웨이 대처 방안으로는 미국 기술이 포함되지 않은 반도체 설계 툴 또는 반도체 장비를 구해 중국 내 양산 체계를 갖추는 방법이 거론되고 있다.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TSMC 물량 일부를 SMIC로 넘기면서 미국 장비 없이도 12인치 웨이퍼 팹을 꾸릴 장기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SMIC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다. TSMC, 삼성전자, 글로벌파운드리 등 글로벌 파운드리 업체에 비해 미세공정 기술이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계 톱5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만만치 않은 경쟁력을 갖췄다. 화웨이는 물론 중국 정부는 반도체 '자력갱생'을 위해 SMIC를 육성할 가능성이 짙고, 한국과 대만·일본 등과 협력을 모색할 것으로 전망된다.
화웨이가 우리나라 반도체 기술을 필수 요소로 보고 국내 반도체업계 대상으로 적극 구애에 나선다면 상황은 간단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장비, 부품 등 해당 업체에는 새로운 사업 기회지만 미-중 갈등의 사이에 끼이게 되는 넛크래커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협조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경우 한국 반도체를 겨냥한 미국의 제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신중한 대응 및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미국 정부가 중국 첨단 산업을 겨냥한 추가 공세를 준비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업체 대상으로 중국 사업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 특히 중국군과의 관련성 여부를 조사하는 것으로 전해져 미-중 갈등은 당분간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