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은행 계좌만을 통해 사업비를 지급하면서 중소기업이 겪는 불편은 비대면 서비스 바우처 사업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부 예산을 투입하는 사업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여전히 수탁은행으로 선정된 특정 은행 계좌를 통해서만 집행이 이뤄지고 있었다. 정부의 사업비 집행 방식이 행정 편의 차원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정부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비즈니스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정부 사업에서는 대면 다접촉 방식을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지원을 받는 중소·벤처기업들은 정부 신규 사업에 선정될 때마다 새로운 법인 계좌를 개설해야 하는 일에 불편함을 호소했다. 특히 수도권이 아닌 지방 소재 기업은 신규 사업 지정 은행을 찾아 법인 계좌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통상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사업자등록증 원본 △법인등기부등본 △법인인감증명서 △위임장 △법인인금 △통장도장으로 사용할 인감 △주주명부 사본 또는 발기인 명부 △부정 사용 방지를 위한 증빙서류 △임대차계약서 등 10가지에 가까운 서류를 들고 은행을 방문해야 한다.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없으면 다시 방문해야 한다. 일반 개인계좌와 달리 법인 계좌를 만들기란 더 번거롭다.
필요 서류가 모두 준비됐다고 해서 계좌가 개설되는 것은 아니다. 은행마다 다른 규약 등으로 말미암아 실제 계좌 개설까지는 각종 시간과 비용이 소요됐다. 예컨대 A은행은 1개월 이내에 신규 계좌를 새로 개설할 때마다 별도의 서류를 요구했다. 사업비를 집행하는 기관이 수탁은행을 변경하는 경우 지정 은행 변경에 따라 기존에 사용하던 계좌 역시 덩달아 이전해야 하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사업비를 지원하는 기관이 별도의 지정 은행을 통해서만 자금을 집행하는 이유는 자금 관리 용이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사업 추진을 위해 편성된 예산이 이미 수탁은행에 예치돼 있는 만큼 단일 계좌를 이용하면 사업에 참여하는 수요 기업과 공급 기업에 대한 신속한 자금 집행에 따른 비용을 지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바우처 사업이 기업의 비대면 서비스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가입 과정 또한 비대면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나아가 정부 지원 사업 전반에 대해서도 계좌 개설 등의 어려움을 대폭 줄이는 등 행정 편의가 아닌 수요자 편의 중심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타 은행 계좌를 통해서도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거나 재난지원금처럼 카드사 인프라를 활용, 복잡한 계좌 개설이 필요 없는 가상계좌를 허용해 달라는 요구다. 이마저도 어렵다면 특정 은행의 신규 대면 계좌가 아닌 자체 가상계좌를 발급, 시스템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상계좌 발급과 적용은 통상 2~3일이면 완료할 수 있다.
중소기업의 한 관계자는 “이번 비대면 바우처 사업뿐만 아니라 창업지원사업, 연구개발(R&D) 사업 등 지원 사업마다 각기 다른 계좌와 카드를 이용하면서 발생하는 불편이 많다”면서 “행정 편의 중심의 자금 집행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지원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