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밥 먹으면서 기자를 가장 괴롭히는 말은 기시감이다.
기시감은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을 뜻한다. 데자뷰와 일맥 상통한다.
그런데 취재 기사를 쓰는 기자도 그 기사를 읽는 독자도 이 기시감을 다수 경험한다.
단독 기사 경쟁을 벌이는 취재기자가 기사를 완성하면 어디에선가 많이 본 기사 같은, 이미 나온 것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미 있던 내용을 나도 모르게 짜깁기하거나 그럴싸하게 인위적으로 재가공하는 일도 발생한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이미 본 것 같은, 혹은 어디서 봤더라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남을때가 많다. 비단 기시감은 언론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금융사들이 경쟁적으로 '디지털 혁신'을 꾀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금융사가 대거 쏟아내는 디지털 혁신 방안이 기시감 같다.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또 디지털과 거리가 먼 사업이나 서비스도 마치 디지털 혁신을 추진하는 것처럼 과대 포장해 발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최근 농협금융지주가 내놓은 디지털 혁신 방안이 대표적이다.
농협금융지주는 디지털 혁신 일환으로 여러 정책을 대거 내놓았다. 은행내 디지털 R&D센터에 공유 서비스 센터를 구축해 디지털 혁신 허브로 육성한다는 내용을 공개했다. 클라우드 기반으로 개방형 협업 플랫폼을 만든다는게 골자다. 이미 국내 금융지주사는 물론 은행 등이 육성중인 핀테크 랩에서 기본으로 하고 있는 서비스다. 농협은행 디지털R&D센터에서도 입주 기업 대상으로 인큐베이팅과 디지털 선행 기술 연구, VC 연계 사업 등을 이미 발표했고, 추진 중인 사안이다. 언뜻 보면 농협금융지주가 새롭게 구축하는 플랫폼으로 여겨지지만 이미 시행중인 내용을 모아 단어만 바꿔 홍보하는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농협내 입주사들도 농협금융지주의 이 같은 디지털 혁신 방안을 보고 '숟가락 얹기'라는 비유를 한다.
또 해커톤 대회를 올해 온라인으로 진행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그러면서 네이버 클라우드와 오픈API 활성화에 지주가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을 공개했다. 이 해커톤 대회 역시 농협은행이 2017년부터 시행해온 행사다. 코로나 여파로 온라인으로 진행한다는 계획이 디지털 혁신 방안과 무슨 관련이 있는 지 의문이다. 고객 소통 강화를 위해 VoC(Voice of Customer)를 계열사별로 도입한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시중 은행은 물론 대형 금융사는 콜센터와 여러 부서에서 AI기반으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전략이다.
다른 금융사는 자동차를 타고 디지털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목적지까지 비싼 신발 하나를 사서 빨리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홍보를 위한 구색맞추기는 지양돼야 한다. 김광수 회장을 비롯한 농협지주 경영진은 기시감을 넘어설 수 있는 보다 본질 있는 DT 혁신에 나서야 할때라고 감히 주문한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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