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에 인쇄회로기판(PCB) 품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가격 상승세에 물량 부족 사태까지 심각해지면서 전례 없는 반도체용 PCB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 반도체의 후공정 생태계 고도화를 위해 PCB 공급망(SCM) 재정비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8일 반도체 패키징 업계에 따르면 최근 고사양 칩 패키징에 쓰이는 기판 공급 부족으로 관련 부품 가격이 기존보다 최고 40% 가까이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패키징 업계 고위 관계자는 “가격 상승 문제가 아니라 물량이 아예 동나면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면서 “각 분야 고객사들이 비용은 얼마든지 치를 수 있으니 물량부터 확보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팹리스 업체에도 심상찮은 타격이 되고 있다.
국내 중소 팹리스 대표는 “최근 패키징 업체에 PCB 물량 확보 기간이 평소의 6배 가까이 늘어난 약 24주 된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면서 “우리 회사는 지난 1월 테이프 아웃(칩 설계안을 파운드리로 보내는 것)한 시제품 칩을 기판 문제로 오는 7~8월에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의 반도체 기판 공급 부족 원인은 플립칩-볼그리드어레이(FC-BGA) 기판 수요 증가에서 기인한다. FC-BGA는 미세한 회로를 여러 겹 적층하면서 면적은 주로 모바일용으로 활용되는 플립칩-칩스케일패키징(FC-CSP) 방식보다 넓게 만든 기판이다.
주로 전기 신호 교환이 많은 고성능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칩 패키징 등에 활용된다. 최근 전기차,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고성능 칩 수요가 폭증했다. 이에 인텔, AMD, 엔비디아 등 반도체 기업의 FC-BGA 기판 수요가 급증했다.
국내외 PCB 업체들은 FC-CSP보다 기술 수준은 고난도이지만 수익성 좋은 FC-BGA 생산에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수요 급증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또 병목 현상은 FC-BGA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그 파장이 FC-CSP 기판에까지 이어져 전반에 걸쳐 반도체 기판 부족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세계 최대 PCB 제조업체인 대만 유니마이크론의 FC-CSP 공장에서 10월과 올해 2월 화재가 연속 발생하면서 납기 지연이 심화했다.
이 같은 공급 부족 사태는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규모 장비 증설이 없다면 이 상황이 수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일각에선 2024년 FC-BGA 수요가 공급자의 생산 능력보다 40%나 더 많다는 전망도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FC-BGA 시장에서는 일본 이비덴과 신코덴키가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최근 관련 투자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동안 삼성전기가 유일한 FC-BGA 기판 공급 업체였지만 최근 대덕전자가 1600억원을 투자하며 생산 라인을 갖춰 가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FC-BGA를 월 2000㎡ 생산하고 있는 대덕전자는 내년 초까지 5000㎡ 규모의 생산 능력을 갖춰 수요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FC-CSP 기판을 주로 생산하는 LG이노텍도 관련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최근 사내에서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사업 현황과 기술 구현 가능성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기도 수요 확대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계현 삼성전기 사장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기판솔루션 사업부 로드맵과 관련해 “생산성 혁신을 통한 생산 능력 확대로 수요 증가에 대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반도체 패키징 업계에서는 FC-BGA 기판 성장성을 고려, 국내 업체들이 차세대 기판 주도권을 거머쥘 만한 더욱 공격적인 투자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자립화와 자국 반도체 SCM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만큼 PCB 및 패키징 기술이 있는 국내 업체들이 급속도로 경쟁력을 끌어올릴 기회가 찾아왔다고 평가했다.
업계 전문가는 “생산 물량이 많은 국내 칩 메이커의 적극적인 투자와 패키징 업체와의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면서 “특히 조만간 'K-반도체 벨트 전략'을 마련할 정부도 반도체 후공정 공급망과 생태계 고도화 정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