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로그디바이스(ADI)가 역대급 인수합병(M&A)을 성사시켰다. 지난 27일 맥심인터그레이티드를 인수하면서 지난 아날로그 반도체 역사 20년간 가장 큰 규모의 M&A 사례를 남겼다. 지난해 ADI가 맥심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인수 규모는 210억달러로 알려졌다. 2017년 ADI가 리니어 테크놀로지를 인수할 때 쏟아부은 148억달러 기록을 스스로 경신했다.
ADI는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에서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 업체다. 이번에 인수한 맥심은 7위를 차지하고 있다. ADI가 맥심을 인수해도 여전히 TI에 뒤처진다. 그러나 공격적 M&A를 추진해 온 ADI는 맥심과 리니어 테크놀로지와 시너지로 TI를 맹추격하고 있다. ADI 관계자는 “이 정도면 TI에 도전해 볼 만한 규모가 된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현재 TI 시장 점유율은 작년 기준 19%다. ADI(9%)와 맥심(4%)를 합친 시장 점유율은 13%로, TI와는 6%포인트 정도 차이가 난다.
여전히 격차가 존재하지만, 시장 업황에 따라 순위 변동이 잦은 분야인 만큼 향후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의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5위 사업자였던 스카이웍스솔루션이 스마트폰향 아날로그 반도체 공급 성과로 1년 만에 3위(2020년 기준)까지 뛰어오른 것이 대표 사례다. 언제든지 시장 순위가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자연과 디지털 세상을 연결하는 가교 '아날로그 반도체' 수요↑
ADI의 맥심 인수 전 2015년부터 1년에 한 번 꼴로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에서 M&A가 이뤄졌다. 시장이 요동치는 배경에는 아날로그 반도체 수요가 자리해 있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 성장률은 작년 대비 29.1%다. 제품별로 따지면 메모리 반도체(37.1%)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성장률이 기대된다.
아날로그 반도체는 빛·소리·압력·온도·습도 등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전환하거나 반대로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주는 집적회로(IC)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시장이 확대되면서 아날로그 반도체 수요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아날로그 반도체가 자연과 디지털 세상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스마트폰 성능 고도화와 자율주행차가 부상하면서 아날로그 반도체는 더욱 각광받고 있다.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반도체 가운데 절반 이상은 아날로그 반도체다. 또 전체 차량용 반도체에서 아날로그 반도체는 59%를 차지하고 있다. 자율주행차와 전기차에는 이보다 많은 아날로그 반도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성장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자율주행차는 외부 시각 정보를 비롯해 온도와 압력 등 다양한 아날로그 신호를 받아들여 디지털로 전환하는 센서가 많기 때문에 아날로그 반도체가 필수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올해 차량용 아날로그 반도체 성장률이 31%를 기록, 무선 통신(28%)과 소비자 제품용(25%) 아날로그 반도체를 앞지르고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신성장 동력 확보 위한 M&A 활발…매출 상위 기업엔 차량용 반도체 강자 포진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 성장의 원동력이 자동차이지만, 모든 아날로그 반도체 기업이 이 분야에 주력하는 건 아니다. 아날로그 반도체 특성상 다품종 소량 생산인만큼 주력 분야의 시장 상황에 따라 경쟁력 격차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 신성장 동력 확보와 기존 사업 간의 시너지 극대화를 위해 M&A를 선택한다.
ADI가 2017년에 리니어 테크놀로지를, 올해 맥심을 인수한 것도 이런 시장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자동차 시장은 리니어 테크놀로지가 주력으로 하는 시장이다. 또 맥심 경우 최근 자율주행 관련 아날로그 반도체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TI가 아날로그 시장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도 차량용 반도체가 있다. 차량용 아날로그 반도체는 산업용·소비자용 제품과 함께 TI 매출 상위 3개 사업 중 하나다. 그 비중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TI 차량용 반도체 매출 비중은 8%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20%가 넘는다.
이 같은 추세는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애플 등 통신용 아날로그 반도체를 주력으로 하는 3위 사업자 스카이웍스를 제외하곤 5~7위 아날로그 반도체 기업은 모두 차량용 반도체를 주력으로 한다. 인피니언, ST, NXP 등이 대표 차량용 반도체 강자다.
아날로그 반도체에서 차량용 비중이 크게 높아지면서 이 시장을 선점하는 기업이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 전반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한 차량용 반도체 업체 대표는 “코로나 19로 인해 자동치 시장이 침체됐다가 지난해부터 업황이 회복되면서 차량용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면서 “차량용 반도체 중 상당 부분을 아날로그 반도체가 차지하고 있는 만큼,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도 자동차 중심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