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반도체 정보 제공, '자율'의 모순

[기자수첩]반도체 정보 제공, '자율'의 모순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난 짜장면.”

직장 회식 때 등장하는 단골 농담거리다. 해묵었지만 특정 권위가 부여한 '자율'의 모순을 표현하기에 이처럼 적당한 것도 없다. 부하 직원에게 중국집 메뉴 선택의 자율성을 주는 듯 하지만 상사라는 권위를 앞세워 그 자율을 제한한다. 이 상황에서 부하 직원이 짜장면이 아닌 다른 음식을 선택하긴 쉽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직장인이라면 여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제한된 자율 혹은 자율 속에 내재된 억압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반도체 업계에도 등장했다. 미국 상무부가 지난달 주요 반도체 기업의 내부 정보를 요구한 것이다. 우리나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물론 반도체 관련 기업 다수가 포함된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미국도 '자율'을 강조했다. 반도체 재고 수량, 주요 고객사, 반도체 소재 등 누가 보더라도 영업비밀을 요구하면서 “기업 자율에 맡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라는 권위는 기업의 자율성을 제한한다. 수출 규제부터 시작해 현재 논의 중인 미국 반도체 투자의 인센티브까지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난처할 따름이다.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있지만 뒤탈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이를 요구할 다른 방법이 있다”면서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길 바라지만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며 사실상 강제 수단 동원을 시사했다. 이 경우 싫어도 '짜장면'(정보 제공)을 먹어야 한다.

미국 정부와 우리 반도체 기업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다. 영업 비밀 제공의 자율은 처음부터 제한받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이런 때는 상대적으로 대등한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의 반도체 기업 정보 제공에 대해 정부 지원을 적극 검토한다고 밝혔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하다. 명확한 가이드라인 없이 우리 기업은 우왕좌왕할 뿐이다. 어떤 기업이 대상인지, 어느 수준의 정보가 공유 가능한지를 명확히 해 줘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 당국과의 긴밀한 협의도 필요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1월 8일이 데드라인이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