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37>전자공업 진흥법 제정

1968년 3월 18일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무역확대회의가 열리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8년 3월 18일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무역확대회의가 열리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8년 8월 5일. 김완희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자공업 진흥조사보고서 브리핑을 끝낸 뒤 이날 미국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인 8월 중순. 신동식 청와대 과학담당 비서관이 김 박사에게 연락했다. 9월 초 미국 바텔연구소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주최하는 재미과학기술자 강연회에 대통령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참석할 예정인데 꼭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강연회는 해외 과학자 유치를 위한 자리였다.

김완희 박사의 회고록 증언. “박 대통령은 내가 잘 있는지와 내 심경 변화가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신 비서관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나 역시 박 대통령을 자주 뵙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당장 컬럼비아대학을 그만둘 수 없었다.(두 개의 해를 품에 안고)”

김 박사는 당시 전자와 컴퓨터 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였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6·25 전쟁 중 군대에서 만난 미군의 도움으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타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박사는 IBM 연구본부에 1년 반 정도 근무하면서 세계 최초로 반도체를 사용한 대형 컴퓨터 설계와 제작, 응용연구에 참여했다. 한국인 최초로 컬럼비아대학 전기전자공학과 주임 교수와 종신 교수직에 올랐다. 닉슨 대통령이 미국 정부에서 함께 일하자며 친서를 보냈지만 학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중히 사양한 일도 있다. 김 박사는 미국을 비롯해 세계 유명 대학교와 연구소, 학회 등에서 초청 강연이 줄을 잇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이른바 '제트기 교수'로 불렸다.

상공부는 김 박사가 브리핑에서 건의한 전자공업 진흥법 제정을 서둘렀다. 전자공업 진흥법 제정은 전자업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현 한국전자산업협동조합)은 1967년 4월부터 상공부에 전자공업 육성을 위해 진흥법 제정을 건의했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은 같은 해 9월 19일 한국의 낙후한 전자공업 육성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 특별지시에 따라 전자공업 진흥법을 곧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황종률 무임소 장관(전 재무부 장관)도 9월 25일 열린 무역확대회의에서 “전자공업을 최우선 육성해야 한다”며 “전자공업진흥법을 연내 제정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상공부는 10월 13일 전자공업 진흥법안을 마련해 관계부처와 업계 협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이 법안과 관련한 상공부 관계자의 말. “전자공업 진흥법안을 제정해야 전자공업을 제대로 진흥할 수 있다는 업계의 여론이 높았습니다. 일본이 전자공업 진흥을 위해 제정한 임시 조치법 자료를 구했습니다. 이 자료를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에 넘겨 진흥법안을 만들어 상공부에 제안하도록 했습니다. 상공부는 전자조합이 제안한 법안과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진흥법안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법 제정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간첩 31명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당 기간 지체됐습니다.”

상공부는 1968년 9월 1일 경제장관 회의를 거쳐 10월 25일 전자공업 진흥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김정렴 상공부 장관은 같은 해 12월 4일 국회 상공위원회에 참석해 전자공업 진흥법에 대해 제안 설명을 하고 조속 처리를 요청했다.

상공부 관계자의 회고. “김 장관은 '전자공업은 선진국이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적극 육성하고 있다'면서 '한국은 전자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노동력과 여건이 충분해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기틀인 전자공업진흥법 제정이 시급하다'며 의원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국회 상공위원회는 보름 뒤인 12월 19일 전자공업진흥법안을 통과시켜 국회 본회의에 제출했다. 국회는 12월 29일 오전 10시 제67회 국회 본회의를 열고 전자공업 진흥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회는 이듬해인 1969년 1월 13일 진흥법을 정부로 이송했다. 정부는 16조 부칙으로 구성한 이 법안을 1969년 1월 28일 법률 2098호로 공포했고, 그해 2월 28일부터 시행했다. 진흥법 제정으로 정부는 전자공업 진흥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했다. 진흥법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상공부 장관은 전자기기 등을 지정하고 제조기술 개발, 전문화와 계열화, 양산화를 추진하고 전자기기 성능과 품질을 개선해야 한다. △상공부 장관은 전자공업 진흥 기본계획을 작성하고 이를 공고해야 한다. 기본 계획에는 '개발 대상 품목 지정과 개발목표 연도 설정' '성능과 품질 개선, 전문화, 계열화' '기술 도입과 기술훈련 지도, 전자공업 시설 개선' '전자공업 단지 조성과 운영 △전자공업 육성 자금조성과 운용' 등을 정해야 한다. △전자공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상공부 장관이 정하는 바에 따라 등록해야 한다. 정부가 정한 성능과 품질 보장이 필요한 전자기기 등에 대한 품질검사 시설을 갖추어야 하며, 그런 시설을 갖추지 못한 경우 검사기관에서 품질검사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전자공업 육성을 위해 장기 저리로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전자공업육성자금을 조성해야 한다. △상공부 장관은 전자공업 진흥 기본계획에 따라 기술개발과 기술훈련, 기술훈련 지도, 해외시장 개척 등에 관한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 △상공부 장관은 전자기기 등의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필요한 때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할 수 있다. △전자공업 육성에 관한 상공부 장관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상공부에 15명 이내로 전자공업심의회를 둔다.

상공부는 이런 진흥법에 의거해 전자공업 진흥 기본 계획서 작성에 박차를 가했다. 전자공업 진흥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은 특별했다. 그해 1월 16일 김동수 대통령 비서실 상공담당 비서관은 상공부가 작성한 기본계획서 내용을 요약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 내용은 △수출 목표 △제품 국산화 △진흥기금 조성 등이었다.

그해 6월 초. 청와대에서 상공부에 전자공업 진흥 기본계획에 대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정렴 상공부 장관은 오원철 당시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에게 브리핑 준비를 지시했다. 전자공업은 오 실장 소관 업무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담당 국장과 과장이 새로 발령받아 업무 파악이 안 된 상태였다. “이 보고는 잘해야지 잘못하면 상공부 전체가 기합감이오. 오 실장이 수고 좀 해 주시오.”

오원철 전 실장의 회고록 증언. “당시 전기공업과 임동준 과장과 윤정우 계장 등 여러 직원들이 며칠 밤을 새우며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브리핑 준비가 끝나자 김정렴 장관이 내용을 보고받고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고 많았소. 준비를 오 실장이 했으니 청와대 브리핑도 해 주시오.”

며칠 후 청와대 별관 2층 회의실. 오 실장은 두 시간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자공업 진흥 기본계획(1969~1976)'을 브리핑했다. 이 자리에는 김학렬 경제부총리와 각부 장관 등이 배석했다. 보고서 골자는 8개년 기간 콘덴서와 전자계산기 등 95개 주요 품목을 개발하고, 1976년까지 수출 4억달러를 달성하며 140억원의 진흥기금을 조성한다 등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이 김학렬 부총리에게 물었다. “부총리, 이 돈을 낼 수 있소?” “예, 각하. 상공부 안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럼 상공부 안대로 추진하시오.”

오 전 실장은 이런 지시를 '대통령의 작전명령 하달'이라고 했다. 상공부는 같은 해 6월 19일 전자공업 진흥 기본계획을 상공부 5369호로 공고했다. 그러자 12월 4일 삼성전자와 일본 산요전기는 전자부품과 세트 제품을 생산할 삼성산요전기, 1970년 1월 20일에는 일본 NEC와 합작으로 삼성NEC(현 삼성SDI)을 설립해 전자공업에 진출했다. 전자공업의 여명기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