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구한말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중 패권경쟁 격화에 따라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요충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제국주의 확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경쟁 이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세계 경제 패러다임 변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은 지난 시대와 달리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대변혁을 극복하고 주도할 수 있을까.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위기이자 기회다. 하지만 준비된 자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대한민국은 기술주권을 기반으로 대한민국 산업의 전략적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는 자유무역이 확산되고 저비용, 고효율 중심으로 글로벌 분업체계가 형성·발전되면서 급속히 성장해 왔다. 특히 중국은 세계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 1위(2020년 31.3%), 세계 1위 품목 수 1위(2019년 1759개) 등을 통해 '세계의 공장'이라는 굴기를 실현했다. 중국은 나아가 인공지능(AI), 퀀텀 컴퓨팅 등 10개 첨단기술분야 특허출원에 있어 압도적 1위(9개)를 차지하면서 미래기술 경쟁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첨단기술이 사이버 공격과 첨단무기에 적용돼 전통적 의미의 군사력 격차를 단기에 해소할 잠재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경제와 안보 경쟁이 통합되고 있다.
이제 세계 패권경쟁 원천은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닌 기술력이다. 미국은 반도체법 제정 등 자국 기술경쟁력 제고 정책을 도입하고, 화웨이 수출규제 등 기술통제를 강화하면서 인도태평양경제네트워크(IPEN)와 같은 국제공조도 적극 추진하는 등 기술패권 우위를 지키려 하고 있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 중국표준 2035 등 자체 기술력 확보에 주력하면서 희토류 통제근거 마련 등 수출통제 대응능력을 제고, 미국 기술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이제 핵심 기술력 확보와 보호는 경제와 안보 경쟁 핵심과제가 됐다.
글로벌 가치사슬은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묶고 있다. 글로벌 가치사슬이 긴밀하게 연결되고 첨단 기술력 확보가 관건인 반도체 산업에서 기술패권 경쟁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복잡한 공정과 긴 생산기간이 필요한 대형장치 산업으로 설계는 미국, 소재·부품·장비는 미국·일본·유럽, 반도체 제조는 한국·대만이 경쟁력을 가지면서 긴밀한 글로벌 분업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등 반도체 수요시장의 50% 이상을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 수출 60%를 중국(홍콩 포함)이, 미국 반도체장비 수출 32%를 중국이, 그리고 중국 노트북·PC 수출 37%, 서버 수출 44%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반도체 생산 및 수요 시장은 세계 각국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단시간 내 글로벌 가치사슬을 변화시키거나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에서 새로운 글로벌 가치사슬 만들기 경쟁은 극자외선(EUV) 기술 및 장비 등 필수적이고 최첨단 기술력이 필요한 부문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반도체 산업 글로벌 가치사슬 형성은 범용재 부문 비용 및 효율 경쟁과 최첨단 기술이 포함된 전략재 부문의 기술력 경쟁으로 나뉠 것이다. 전자는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후자는 경제, 안보, 기술 협력 우호국 중심 시장으로 글로벌 가치사슬을 형성,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한국은 자유무역 확산 시대에 글로벌 분업구조를 성공적으로 활용하면서 고유한 제조역량을 축적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한국 제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율(2017년)은 55%로 독일 51%, 일본 45%, 미국 44%에 비해 높은 편이다. 그리고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 정유 산업과 같이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고도의 일관 설비를 초정밀하게 관리, 활용하는 한국의 제조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제 한국 제조업은 우리만의 고유한 핵심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 제조업은 지금까지 부가가치가 크고 성장이 빠르고 조기 확보가 가능한 유망기술 확보에 주력해 왔다. 하지만 새로 재편되는 글로벌 가치사슬에서는 시장이 좁더라도 성장에 있어 필수이고 핵심적인 최첨단 기술(전략기술) 확보가 중요하다. 한국 제조업은 현장 제조역량을 기반으로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전략기술을 확보할 때 비로소 새로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전략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산업 전략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롭고 과감한 산업정책 도입이 필수다. 우선 기술혁신과 지식축적 현장인 제조기반 유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제조 현장은 물건을 만드는 현장일 뿐만 아니라 기획, 연구, 제조, 마케팅, 유통, 금융 등 모든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산업 생태계 주춧돌이다. 중국이 제조역량을 기반으로 기술 리더십에 도전하고, 미국이 제조역량 부족으로 월등한 기술 리더십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전략기술 확보는 시장과 민간만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전략기술은 시장이 좁고, 장기간 대규모 투자와 산학연간 공동 연구, 수급 기업간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고, 실패 위험이 크다는 특징과 함께 다른 나라와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제약요인도 함께 지니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안정성 기여도, 성장 잠재력, 기술 난이도, 연관 산업 및 경제적 파급효과 등을 고려해 반도체, 미래차, 바이오, 소재·부품·장비 등 산업부문에서 임무지향적 방식으로 전략기술을 선정해야 한다. 그리고 선정된 전략기술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투자, 인력, 연구개발(R&D), 조달, 규제혁신 등을 일괄적이고 전폭적이며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특히 예산 및 교육 제도 개혁을 통한 획기적인 자금과 인력 지원이 시급하다.
공급망 안정성을 중심으로 글로벌 가치사슬이 재편되고 있다. 그렇다고 한 나라가 모두 담당할 수 없다. 대한민국 산업은 미·중 기술패권 경쟁으로 추가 확보된 시간 안에 재편되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전략적 가치를 확보해야 한다. 우선 탁월한 제조역량을 바탕으로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전략기술 확보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관이 함께 하는 새롭고 과감한 산업정책을 지금 당장 추진해야 한다.
성윤모 한국산업기술대학 이사장(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yunmosu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