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48>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과학원

1973년 3월 5일 한국과학원 석사과정 입학식 모습. <KAIST 제공>
1973년 3월 5일 한국과학원 석사과정 입학식 모습. <KAIST 제공>

한국과학원(현 KAIST)이 석사과정 합격자를 발표한 지 1개월여 후인 1973년 3월 5일. 한국과학원은 이날 기숙사 건물에서 제1회 석사과정 입학식을 열고 과학기술 한국을 향한 힘찬 첫걸음을 내디뎠다. 과학기술 미래를 책임질 신입생의 가슴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찼다. 신입생은 전기·전자공학과를 비롯한 6개 학과 106명이었다. 이 가운데 전일제 학생은 76명, 산학제 학생은 30명이었다. 산학제 학생은 산업체와 군, 학교, 연구기관 근무자들이었다.

과학원은 석사학위 교과목은 공통필수, 필수, 선택으로 구분했다. 공통필수는 모든 학생이 이수해야 할 과목이었다. 당시 대학원 과정에서 공통필수를 채택한 학교는 과학원이 국내 처음이었다. 하지만 당시 과학원이 처한 현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입학식을 했지만 막상 공부할 곳이 없었다. 과학원 본부, 도서관 건물인 행정동 1호관과 강의실, 연구동 2호관 공사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실험실습 기자재 구입도 지연됐다. 난감한 일이었다.

과학원은 인근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현 KISTI) 강당에서 준비교육을 했다. 교육 과목은 수학, 물리학, 화학, 영문보고서 작성, 특허법 등이었다. 신입생이 한 곳에서 교육을 받다 보니 학과별 칸막이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과학원은 정상 교육이 어렵자 9월까지 잠시 멈춤을 선택했다. 학과별로 학생교육 계획안을 마련해 특별 교육을 진행토록 지시했다.

당시 과학원 관계자의 말. “우선 학과별 교육계획을 마련해 특별 교육을 실시키로 했습니다. 개인지도와 세미나, 연구 활동에 일부 학생을 참여시키고 산업시설 견학 등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간에 군미필자는 군부대에 입소해서 훈련을 받도록 조치했습니다.” 과학원 교수는 면담을 통해 개인지도를 하고 세미나를 열어 강의했다. 교수 연구 활동에 과별로 학생을 참여시키고 산업체 견학 등을 실시했다. 견학한 산업체는 울산, 포항, 구미 등 국내 대표 산업단지였다.

전일제가 아닌 산학제 학생은 원래 소속기관 연구 분야에서 근무하면서 과학원과 긴밀한 산·학 활동을 했다. 군미필 학생은 서울 수색에 있던 육군 모 사단 교육대에서 3주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교육생은 1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같은 내무반에서 공동 생활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받다 보니 모두 친한 사이가 됐다.

과학원은 신축공사에도 속도를 냈다. 8월까지 4층 건물인 1호관과 2호관을 완공했다. 1호관 1층에는 강당과 식당, 2층과 3층에는 행정 사무실, 4층에는 도서관을 각각 배치했다. 연구동 2호관에는 학과 사무실, 실험실, 공작실, 창고 등을 배정했다.

같은 해 9월 17일. 한국과학원은 이날 오전 9시에 완공한 대강당에서 개강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박달조 원장을 비롯한 교수진과 민관식 문교부 장관,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 국내 과학자,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박달조 원장은 식사를 통해 “여러분이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짊어질 주역들”이라면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축사를 통해 “앞으로 경제는 과학기술 발전에 달려 있다”면서 “특히 과학기술 인력 양성이 과학기술 발전을 앞당기는 요체이며, 이를 위해 첨단 과학기술 연구에 최선을 다해서 미래 한국과학기술 발전의 주인공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과학원은 개강식 이튿날인 18일 오후 2시 30분 대강당에서 트랜지스터를 발명해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석학 월터 하우저 브래튼 박사를 초청해 개강특별 강연회를 열었다. 브래튼 박사의 강연 주제는 '반도체의 기원'. 당시는 생소한 주제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노벨상 수상자의 강연 내용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노트에 기록하고 가슴에 새겼다.

브래튼 박사는 특강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무엇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사물의 현상을 관찰하는 '과학'이라는 학문에서 실험을 완전히 끝냈다는 사실보다는 실험 도중의 관찰이 더 중요합니다. 개발도상국이 선진 기술을 받아들일 때는 언제나 그 나라 고유 문화와 철학을 염두에 두고 결정해야 합니다.”

과학원은 이후 진정한 의미의 이공계 교육을 실시했다. 교육 과정은 엄격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파격적인 교육 방식이었다. 국내 대학은 그동안 이공계 교육의 필수인 실험을 하지 못했다. 기자재와 실험실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교과서 중심 문제 풀이에만 집중했다. 과학원은 기존 강의 일변도 교육에서 벗어나 강의와 실험을 병행했다.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는 원칙에 투철했다. 숙제는 산더미였다. 제출한 숙제를 일일이 확인해서 붉은 펜으로 첨삭한 후 되돌려줬다.

학생들은 날마다 올빼미 생활을 했다. 과학원에는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교수도 일찍 출근해서 새벽까지 연구실을 지켰다. 과학원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 1회 석사과정 입학생이자 과학원 1호 박사 학위를 받은 양동렬 전 기계공학과 교수의 회고. “석사과정 시절에 과학원 생활은 제게 천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입니다. 숙제가 많아 밤샘을 밥먹듯이 했지만 '공부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고 수험생을 대상으로 과외하던 시절에 비하면 과학원 생활은 천국이었어요. 공부 외에 다른 걱정을 할 일이 없었어요. 매월 받은 장학금도 쓸 일이 없었습니다. 모든 걸 과학원 안에서 해결했어요. 숙제하고 실험을 하느라 과학원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전기·전자공학과의 첫 학기 강의는 박송배 교수가 회로 이론, 나정욱 교수가 전자기 이론, 김재균 교수가 통신 이론을 각각 강의했다. 나정웅 당시 교수의 회고. “기초실험은 실험 장비를 익히는 정도를 넘어 대학 교육을 한 단계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숙제는 실험 후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기초 과목 강의는 과목당 3학점으로, 미국 대학원과 같이 매주 2~3개 숙제를 내주고 학생이 제출한 답안지를 교수가 직접 채점했습니다. 실험 과목은 1학점이었지만 학생들이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한 과목이었습니다.”

과학원 교수는 독특한 방식으로 창의력 교육을 했다.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배순훈 당시 기계공학과 교수는 창의력 계발을 위해 '달걀 던지기 대회'를 개최했다. 4층 건물 옥상에서 달걀을 떨어뜨려서 바닥에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방법을 생각한 학생에게 상을 주는 대회였다. 배순훈 당시 교수의 회고. “물론 달걀을 깨지지 않게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뭔가 창의적인 방법을 개발하기 위한 대회였습니다. 조건은 그 비용이 1000원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여러 기상천외한 방법을 제시했지만 1등은 깡통 안에 물과 공기를 적절히 섞은 비닐 봉지를 집어 놓고 그 속에 스티로폼으로 싼 달걀을 놓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학생이 차지했어요.”

배 전 장관은 교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연탄 온돌방 가스중복 방지 방안을 연구했다. 과학원을 순시한 박 대통령이 배 교수가 미국 MIT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관계자의 말을 듣고 “연탄 온돌방에서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은데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배 교수는 연구비를 지원받아 과학원 안에 집을 한 채 지어 놓고 온돌가스 연구에 착수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 무색무취한 가스가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를 본 박 대통령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말고 되는 방법을 제시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배 교수는 대안으로 온수 온돌을 제안했다. 이게 오늘날 온수 온돌의 시작이다.

과학원 개강은 애초 계획보다 6개월여 늦었지만 교육 과정은 국내 과학기술 교육 개혁의 시발점이라고 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과학원 생활은 무수한 밤샘과 강의, 실험, 숙제의 연속이었다. 교수들의 남다른 교육열과 학생들의 치열한 학구열은 과학기술의 미래를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