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부장칼럼]반도체 산업 인재, 공적 활용하라

[소부장칼럼]반도체 산업 인재, 공적 활용하라

약장(藥欌)을 만드는 작업은 나무 장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수백 개의 나무 조각이 물 샐 틈 없이 짜 맞춰져서 오랜 세월 뒤틀림 없이 칸막이가 유지되고 서랍이 부드럽게 여닫히도록 만드는 일은 여간한 실력과 정성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약장을 다룬다고 하면 장인 세계에서는 인정받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983년 특허청에서 심사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심사를 맡은 분야는 인쇄기계였다. 신문지를 인쇄하는 윤전기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에다 기능과 구동의 복잡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걸 풋내기더러 심사하라고 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쇄기계를 가르치는 대학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하나하나 배우면서 심사하던 고통의 시간이 지금도 떠오른다.

특허 도면과 명세서를 가지고 씨름한 결과 몇 년 지난 후에는 출원된 서류를 대충 훑어만 봐도 이게 특허감인지 아닌지 척 눈에 들어오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축적된 경험과 지식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오래 묵은 생강이 맵고 오래도록 묵은김치가 깊은 맛을 낸다.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이라고 아직 어린 비둘기가 큰 고개를 넘지 못한다는 격언도 이래서 나온 것이다.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잘 활용하는 것이 인력 운용의 요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베이비붐 세대의 우수한 산업 인력이 많이 퇴직하고 있다. 현장에서 수십 년 동안 갖은 경험을 하며 쌓아 온 지식을 퇴장시키지 말고 써먹는다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지식 장벽을 허물고 지식의 융합을 통해 더 높은 지식사회로의 발전을 꾀하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특히 민간과 공공부문의 인력 이동을 촉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공공부문에서 민간부문으로의 이동은 상당히 활발한 반면에 역으로는 잘 안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공의 틀은 민간이 접속하기 어렵다. 민간에서 공공부문으로 가는 다양한 방안을 만들어 주는 것이 긴요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반도체산업 분야에서 종사한 우수한 산업 인력을 특허심사관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특허청은 지식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서 지식 권력으로서의 발전적·형성적 권력을 도모하는 기관이다. 이런 특허청이 제대로 된 인력을 써서 제대로 된 특허를 산출하는 것은 국가의 지식 영토를 제대로 가꾸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만약 특허청이 부실 심사를 한다고 하면 그건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심사관의 연간 심사처리량은 2020년 기준으로 206건에 이르고 있어 일본의 164건, 미국의 73건, 유럽의 58건에 비해 턱없이 많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심사가 될지 의구심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특허 심사를 하려면 경험 많은 양질의 특허심사관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거기에 딱 맞는 인력이 산업계 베테랑인 퇴직 인력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와 같은 첨단 산업 분야에서 종사하고 공직에 근무하고 싶은 인력에 특허심사관 역할을 맡기면 제격이다. 공직에서는 이들이 민간에서 받던 돈보다 훨씬 적은 급여밖에 줄 수 없고, 이들은 20년의 장기근속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금 대상도 될 수 없다. 돈만 따지면 공직으로 올 이유가 없다. 시쳇말로 눈 딱 감고 중국에 스카우트돼 몇 년만 일해 주면 평생 쓸 돈을 모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일을 해 본다는 보람과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 살려 기업에서 하던 일과는 다른 일을 해 본다는 도전은 공직으로 이전하는 이들에게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전 세계는 반도체 전쟁의 포화에 휩싸여 있다. 사람과 돈을 쏟아부으며 전쟁에서 이기려고 다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기술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사람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특허청에 심사관으로 가려는 산업계 인력은 고마운 존재다. 특허청은 이들을 쓰려면 강한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뻐기고 군림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조용한 이면에서 묵묵히 일하는 자리에 가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무엇이 없다면 말이 되겠는가. 이들에게 자리를 주고 열심히 일하게 하라. 지금까지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게 하라. 그것이 공공과 민간을 모두 살리는 일이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changhan.lee@ksi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