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한 교수의 정보의료·디지털 사피엔스]뇌의 기억법과 프라이버시

[김주한 교수의 정보의료·디지털 사피엔스]뇌의 기억법과 프라이버시

우리는 늘 무언가를 의식 속에 저장하고, 다시 생각해 낸다. 수천개의 단어와 수백명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그 복잡한 상호관계도 다 기억한다. 뇌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까. 뇌도 컴퓨터처럼 메모리에 코드화된 원시 데이터를 저장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 불러올까? 많은 뇌과학 연구에도 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뇌의 가장 단순한 기능인 '기억'에 대해서조차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저 막연히 컴퓨터 메모리 소자에 저장된 비트처럼 우리 뇌도 원시 데이터 자체를 어딘가에 저장해 놓고는 필요해지면 검색기를 돌리듯 메모리 소자를 뒤져서 저장된 기억을 찾아내지 않을까 하는 어림짐작이 뇌의 기억법에 대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다.

복잡한 인공신경망 같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뇌의 추론 기능을 모사해서 개발된 것들이다. 그런데 가장 단순한 뇌의 기억을 설명하는 모형은 역설적으로 메모리 소자에 데이터를 저장·검색·호출하는 기계장치 기능을 모사한 모형밖에 없다. 아니다. 뇌는 컴퓨터와 달리 원시 데이터를 코드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 영어 단어를 달달 외우고 기억하려 애쓴다. 단어를 코드 그대로 저장한다면 밤새 에너지를 써 가며 '애써' 달달 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순 저장에 필요한 에너지는 고차원적인 상상이나 창작에 필요한 양보다 매우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뇌에는 비트나 문자나 코드 그대로 저장해 둘 메모리 소자는 없다. 그러므로 기억을 호출할 때도 메모리 소자를 뒤져서 저장된 코드를 그대로 읽어 오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뇌가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과 호출하는 방식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과정이다. 뇌는 지각하거나 인지한 정보의 코드를 고유한 방식으로 부호화·암호화(encode)한다. 하지만 뇌 자신도 그 부호화 방식과 암호화 키가 무엇인지 모른다. 결국 암호화된 기억은 기계적으로 읽을 수 없다. 오직 해석 또는 해독 대상이다. 수학적 암호화에서는 데이터를 암호화 키(함수)로 암호화하고, 그 역함수로 해독·복호화(decode)한다. 즉 암호화와 복호화는 대칭적 과정이고, 암호화 방법을 모르면 복호화도 불가능하다. 둘은 완전히 하나다. 반면에 뇌의 기억 저장과 호출은 마치 독립적인 두 사람의 대화처럼 완전히 둘로 나뉜 차단된 과정이다.

뇌의 기억 저장 암호화 과정과 기억 호출 복호화 과정, 둘 사이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단순 역함수 관계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뇌의 기억법은 질의문에 따라 데이터를 찾아서 '기계적'으로 읽는 질의-응답 관계가 아니다. 뇌의 기억법은 두 사람 사이의 '상징적 질문'과 '상징적 해석'이 오가는 '자율적' 조언자 또는 자문역 관계에 더 가깝다. 겉으로는 매우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기억 저장과 호출 과정의 철저한 분리는 인간의 뇌에 고도의 보안성 및 자율성을 제공한다. 본인 자신도 암호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해킹 공격에 큰 내성을 보인다. 본인 자신도 원본 데이터에 접근할 수 없을 때, 그렇지만 그 원본 데이터의 관계와 영향을 충분히 고려한 질의응답이나 토론을 할 수 있을 때 데이터 프라이버시가 시작된다. 데이터 프라이버시는 데이터의 노출 위험 없이 데이터를 사용하는 신기술이다. 손금을 보려면 점쟁이에게 내 손금을 꼭 보여 주어야만 한다던 통념은 깨어지고 내 손금을 노출하지 않고도 손금 해독을 받아 볼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이다. 동형암호화나 영지식증명 등의 신기술 개발은 빅브라더화에 대한 우려를 극복하고 자율성과 데이터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서 고도 정보화 사회로 도약하는 필수불가결의 첫걸음이다. 그동안 비효율적으로만 보이던 뇌의 기억법에서 정작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얻는다.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