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경쟁 구도 속에서 인재 쟁탈전 등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특허청은 21일 국회에서 '반도체 전쟁 시대, 특허로 본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는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여야 위원들이 공동 개최(김한정·양향자·한무경 의원)하고, 특허청이 주관했다. 여야 국회의원이 참여해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세미나는 우리 경제와 안보 핵심인 반도체 산업의 최근 기술·특허 동향과 반도체 인재 쟁탈전에 대해 살피고, 이에 대응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국회 산업위 차원에서 모색하고자 마련됐다. 첫 번째 발제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 기술개발 동향 및 우리의 대응 방안'을 주제로 박재근 한양대 교수가 연사로 나섰다. 박 교수는 주요국 간 최신 기술개발 경쟁 구도를 설명하고, 우리 반도체 산업이 나아갈 방향으로 연구개발 및 인력양성, 국내 소부장 경쟁력 강화 등을 강조했다. 두 번째로 '반도체 인재 쟁탈전, 특허로 본 우리의 대응 방안'을 주제로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이 발표했다. 손 원장은 반도체 인재 유출 방지를 위해 민간퇴직자의 특허심사관 채용 등 고경력 기술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방안을 제언했다.
산업계를 대표해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 백홍주 원익QnC 대표 등 반도체 분야 전문가들이 패널로 참석했다. 이들은 우리 기업은 제조경쟁력에 비해 장비 및 소재 경쟁력은 뒤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라며, 안정적 공급망 확보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과 기술 경쟁력 제고를 위한 인재 양성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한정(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산업위 간사)=최근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핵심기술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 반도체 인력은 중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인재 빼가기 표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숙련된 반도체 인력에 대해 해외 기업들은 국내 기업보다 월등히 높은 연봉 등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하고 있어, 기술자들이 유혹에 흔들리는 상황이다.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퇴직 인력의 해외 유출로 인한 기술 유출 방지 대책이 시급하다.
국정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핵심기술 유출 시도는 99건으로 약 22조원 규모에 달하고, 기술 유출의 절반 정도가 퇴직자에 의해 발생(퇴직자 유출 46%)하고 있는 긴급 상황이다. 1980년대 반도체 강국이던 일본 반도체 전문가가 한국이나 대만으로 유출돼 산업이 붕괴한 사례를 보더라도 국가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최근 특허청이 해외 기업의 인력 빼가기를 통한 핵심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국가 핵심기술 분야 퇴직 전문가를 심사관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적극 공감하고 있다. 반도체 분야 퇴직 인력을 특허청에서 심사관으로 채용하면 해외 기술유출 방지와 신속·정확한 고품질 심사도 가능해 일석이조가 된다. 우선 올해 시범적으로 추진 중인 반도체 퇴직 인력 특허심사관 채용을 잘 진행하고, 향후 관계부처와 협의해 배터리, 바이오 등 국가 핵심기술 분야로 점차 확대할 필요가 있다.
◇양향자(국회의원, 국민의힘 반도체특위 위원장)=지금의 위기는 한국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핵심인 시스템반도체 시장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 원인이 있다. 경기 등락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은 메모리 분야에서 절대 강자였지만 시스템반도체에서 취약하며, 1위 대만 TSMC와 격차가 여전히 큰 상황에서 미국 인텔 등이 추격하고 있다.
먼저 세계 1위 TSMC가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특허 전략을 짜고 있고, 미국 1위 글로벌 파운드리즈와 최대 30년간 포괄적 크로스라이선스를 체결하는 등 적극적이다. 소부장에 강한 일본에 공장을 건설하고 연구개발(R&D) 거점을 세우는 등 일본과 협력도 강화되고 있다. TSMC를 중심으로 미국-대만-일본 간 연합전선이 형성되는 경우 제조·생산에 특화된 우리 기업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
메모리 분야에서도 마이크론 등 특허 신청이 급증해 양적으론 이미 우리를 추월했고, 특허경쟁력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향후 바이든 정부의 물밑지원까지 더해진다면 이제는 메모리 분야도 방심할 수 없다. K-칩스법에서 세제 혜택을 대폭 늘렸다. 세금을 줄여 기업 투자를 끌어내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장비 1개를 살 계획이었다가 세액공제 영향으로 2개를 사게 되고 그 결과 일자리가 늘고 생산성이 높아진다. 이미 미국은 반도체 육성법을 통해 세액공제율 25%를 지원하고 있다. 더는 K-칩스법을 늦출 수 없다. 바이오, 배터리 등 유망 산업이 많지만 모두 반도체 없이 안 된다. 반도체 지원은 한 산업, 한 기업을 지원하는 문제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국가 대개조 프로젝트 차원에서 봐야 한다.
◇윤관석(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산업위 위원장)=미국과 중국 등 세계 주요국은 핵심 산업인 반도체 분야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치면서 동시에 공급망을 재편하려고 노력하는 등 반도체 기술 패권 경쟁이 날로 격화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 개선 노력과 미국의 제재로 올해 상반기 우리나라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액이 1년 전보다 50% 급감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맞서, 우리 국회는 여야가 함께 마음을 모아 '국가 첨단전략 산업법'을 제정하는 등 반도체 산업 육성에 힘써오고 있다. 앞으로도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 유지와 공급망 강화를 위해 정부뿐 아니라 국회도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을 서둘러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지난 9월에 산업위 의원과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해 반도체 생산 현장을 살펴본 적이 있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3나노 반도체 양산에 성공해 큰 화제가 됐다. 경제 안보 차원에서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양산은 의미가 매우 크다. 현재 TSMC가 세계 1위 기업이지만, 초미세 공정 등에서 한발 앞서 나감으로써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앞으로 반도체 수율 등에서도 많은 개선이 이뤄져 시장 점유율에서도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산업위 위원장으로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해서 국회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더욱더 고민하고 다양한 지원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한무경(국민의힘 국회의원, 산업위 간사)=최근 미국 상무부는 한층 강화된 대중국 반도체 기술 및 장비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했다. 첨단 반도체 장비와 고사양 반도체 등 중국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중국의 기술 경쟁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으로 반도체 전쟁이 촉발됐고, 주요국들은 앞다퉈 반도체 산업 강화를 위해 막대한 규모의 지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자국 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고 있으며, 최근 미국이 메모리 강자인 마이크론에 보조금을 지급해 미국 내 공장을 신설하도록 한 것이 대표 사례다.
반도체는 글로벌 분업이 잘 이루어진 산업으로, 설계는 미국이, 제조는 한국과 대만이, 조립검사는 대만과 중국이 강자다. 안타깝게도 미국, 유럽,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설계·장비·소재 분야는 기술 장벽이 높은 상황이다. 제조·생산에 강점이 있는 우리에게 설계·장비·소재 분야 공급망 관리는 생존의 문제다. 특히 해외 의존도가 높은 분야를 중심으로 공급망을 잘 파악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크다.
2019년 일본 수출규제 이후 반도체 제조 핵심 품목인 포토레지스트, 폴리이미드는 여전히 높은 대일 수입 의존도를 보인다. 포토레지스트는 81.2%,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93.1%로 나타났다.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산화텅스텐은 94.7%, 전자제품의 경량화에 활용되는 네오디뮴 영구자석은 86.2%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등 대외 의존도가 높은 분야에 대한 공급망 관리가 필요하다.
◇이인실(특허청장)=특허청은 기술 패권 시대에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여러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먼저 반도체 우선심사 지원으로 심사 기간을 대폭 단축한다. 반도체 분야 우선심사를 11월부터 시작해 기존 12.7개월 정도 걸리던 것이 2.5개월로 대폭 단축될 전망이다.
반도체 민간퇴직자를 특허심사관으로 채용한다. 새 정부 국정과제로 핵심 특허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심사와 국내 재취업 유도로 해외 기술 유출을 방지하려는 조치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반도체 분야 퇴직 기술자를 특허심사관으로 채용해 신속·정확한 심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전문 인력의 해외 유출을 방지할 수 있다. 현 정부 인력 운영 기조를 반영해 올해 반도체 전문심사관 30명을 우선 채용하고, 성과를 보아가며 내년 배터리, 바이오 등 반도체 플러스 분야로 채용 규모를 확대할 예정이다.
특허 빅데이터를 살펴보면 기업 전략부터 산업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다. 시장 선점을 위해 제품 출시 전에 신청하는 특허는 기술의 흐름과 기업의 기술개발 전략을 알려주는 유용한 정보다. 특허 빅데이터는 기업, 연구소, 대학 등이 만들어낸 고급정보의 집약체로, 특허청은 전 세계 5억1000만건의 특허 빅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 특허를 보면 다가올 잠재적 위기와 경쟁 구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특허청은 관계부처에서 반도체 R&D 계획 수립 시 특허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제공해 신뢰도 높은 데이터 기반의 정책이 수립되도록 적극 지원해 나갈 것이다.
◇박재근(한양대 교수,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세계 반도체 매출액의 45% 정도를 미국 기업이 차지하고 있지만, 제조점유율은 12%에 불과하다. 미국은 그동안 반도체 설계에 주력했고, 그 결과 제조는 취약하다. 반면 한국과 대만은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팹리스의 70% 이상이 TSMC에 생산을 맡기고 있지만, 대만 TSMC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있다. 중국이 대만을 공격해 점령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반도체를 공급받지 못하고, 치명적인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이 자체 공급망 확보를 위해 파운드리 유치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최근 차량용 반도체 확보가 국제적 이슈였고, 자동차 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유럽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유럽도 반도체를 확보하지 못하면 주력 산업인 자동차 산업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매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2030년까지 매년 7~8% 성장할 전망이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반도체 소부장의 업그레이드가 필수다. 우리나라도 소부장의 50% 이상을 미국과 일본 등에서 받아야 해서 칩4 동맹을 통해 소부장의 안정적 확보가 필요하다. 우리는 동맹국으로 제대로 대우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한국 기업이 중국 공장을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양승민기자 sm104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