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반도체 핵심 생태계를 맡아온 것이 바로 반도체 팹리스다. 회로를 설계, 시스템 반도체를 개발하는 기업부터 설계 지원과 파운드리 간 가교 역할을 맡는 디자인하우스, 반도체 설계자산(IP) 공급업체 등 다양한 기업이 팹리스에 해당된다. 세계 시장에서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핵심 주체 역시 팹리스다. 퀄컴, 엔비디아, AMD, 브로드컴, 미디어텍 등 강력한 팹리스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팹리스 산업은 경쟁력이 뒤처졌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국내 1위 팹리스인 LX세미콘의 2021년 매출 순위는 세계 12위 수준이다. 나머지 팹리스는 대부분 중소기업으로 세계 50위권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삼성전자라는 세계 유수의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인프라를 갖췄음에도 팹리스 생태계가 빈약하다. 팹리스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 반도체 역량 확보가 시급한 이유다.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을 높이려면 팹리스가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 우리나라 팹리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업계가 모여 교류와 논의의 장인 '한국시스템반도체포럼'이 지난해 3월 창립됐다. 국내 팹리스 기업 간 협업으로 산업이 커갈 수 있는 방법론을 논의했다.
이후 보다 실질적이고 영향력 있는 한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었다. 올해 8월 포럼이 한국팹리스산업협회로 도약하게 된 계기다. 한국팹리스산업협회는 법적 근거를 확보한 우리나라 최초 팹리스 산업 관련 단체로 100여개가 넘는 팹리스 기업이 참여했다.
초대 협회장을 맡은 이서규 픽셀플러스 대표는 포럼 때부터 업계 목소리를 대변하는데 노력했다. 임기 동안 팹리스 업계 의견을 적극 개진하며 견고한 생태계 조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 회장에게 팹리스 산업 발전을 위한 방법론을 들으며 협회가 어떤 역할을 담당할지 들었다.
대담=장지영 전자신문 부국장(소재부품부 데스크)
-한국팹리스산업협회가 출범하게 된 배경과 목표는 무엇인가
▲반도체는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로 구분할 수 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로봇, 드론, 사물인터넷(IoT), 가상현실·증강현실(VR·AR), 클라우드 컴퓨팅 등 4차 산업혁명 기술 핵심은 시스템 반도체 쪽이다. 기존에 반도체산업협회가 있었지만 제조업 성격이 강해 팹리스 산업만의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았다. 시스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해야할 중대한 시점에서 업계 목소리를 반영, 건강한 팹리스 산업 생태계를 만들고자 하는 순수 팹리스 업체의 염원으로 협회를 창립했다.
협회 목표는 한국 팹리스 산업, 더 나아가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자하는 것이다. 1000여개 이상 다양한 기술 팹리스가 탄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겠다. 5개 이상 글로벌 팹리스 업체가 탄생해 세계 시장 점유율 10% 이상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표다.
-시스템반도체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지만 시스템 반도체 역량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메모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30여년간 지속적으로 지원 육성했다. 그래서 메모리 강국이라는 오늘날에 이르렀다. 팹리스 산업 역시 정부 지원이 있었지만 큰 성과가 없다. 많은 팹리스가 정부 과제를 하지만 첨단 기술보다는 성숙 기술에 집중됐다. 업계를 견인하고 성장 시킬 동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첨단 기술은 연구개발(R&D)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일부 과제를 성공하더라도 시장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성숙 기술로 진행한 과제는 시장 수요가 없어 양산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대만이 바람직한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가지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는 팹리스, 파운드리, 후공정(OSAT) 산업으로 구성된다. 선단 역할을 하는 팹리스가 완성품(세트) 업체 시장 동향을 잘 파악해 시장 친화적 시스템 반도체를 어떻게 선제 공급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파운드리 업체와 협엽이 필요하며 OSAT 성장과도 직결돼 있다. 대만의 생태계가 견고한 것은 정부 주도로 산업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4차 산업 혁명 기술 핵심인 팹리스 산업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주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메모리 산업보다 2~3배 큰 고부가가치인 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만들어야 종합 반도체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
-세계 굴지 반도체 기업 중 팹리스 기업이 많이 포진돼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글로벌 대표 기업을 찾기 힘들다. 우리 팹리스 산업의 가장 큰 약점은 무엇인가.
▲중국 팹리스 산업을 보자. 세계 시장 규모면에서 10%에 육박한다. 이는 시장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 팹리스 산업의 강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글로벌 가전업체와 자동차 업체가 있다. 그러나 완성품에 탑재되는 시스템 반도체는 신뢰성이 높은 외산을 주로 사용한다. 국내 팹리스 업체엔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것이다.
특정 시스템 반도체가 신뢰성을 높이려면 완성품 업체와 협업이 필요하다. 생산 현장에서 검증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팹리스 업체엔 국내 완성품 업체에 공급하는 사례가 더욱 필요하다. 최근 글로벌 공급망 문제로 국내 완성품 업체도 부품 공급망 자국화에 대한 의지가 보이고 있어 이는 긍정적이다.
-팹리스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생태계가 중요하다. 팹리스 기업뿐 아니라 정부, 파운드리·OSAT, 학계, 연구계와 협업과 상생이 필요하다. 협회는 이런 부분에 어떤 노력을 하는가.
▲전방위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 자율주행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팹리스산업협회는 지난 7월 한국자율주행산업협회와 기술 교류를 하기로 결정했다. 국내 대표 반도체 학회인 반도체공학회와도 시스템 반도체 육성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정기적인 워크숍으로 협력 저변을 넓히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주관하는 '팹리스-파운드리 상생 협의회'에도 참여, 팹리스와 파운드리 간 협력 방안을 지속 논의하고 있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주관으로 운영하는 'AI 반도체 스케일업 네트워크'에서도 국내 AI 반도체 역량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반도체 팹리스 업계 목소리를 정부와 국회에 개진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 팹리스 현황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며 팹리스 산업 발전을 위한 여러가지 제언을 하고 있다.
-협회는 시스템 반도체 역량을 높이기 위한 방법론으로 '멀티프로젝트칩(MPC)'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존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추진하는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와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왜 필요한가.
▲MPW는 웨이퍼 한 장에 다수 회사 반도체 칩을 만드는 방식이다. 여러 팹리스가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추진하는 방식이다. 반면 MPC는 한 장의 웨이퍼에 반도체 IP나 코어, 라이브러리, 소프트웨어(SW)가 한칩으로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여러 회사 반도체 설계 성과물이 하나의 칩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러 팹리스가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최근 AI 반도체를 개발하려면 비용이 수백억원에 달하게 됐다. 이는 중소·중견기업이 대부분인 국내 팹리스에게는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 지금은 AI 시스템 반도체 태동기다. 제품 개발의 적기라고 할 수 있다. 각 분야에서 개발 역량이 뛰어난 팹리스가 각자 영역에서 반도체 설계물(IP)을 합쳐 고성능 첨단 AI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MPC 전략이 필요하다고 본다.
MPC 사업 전략은 AI에 최적화됐다. 그래서 'Ai-MPC'라고도 부른다. MPC 방식을 초기에 AI 영역에 집중해 성과를 내고자 한다. 현재 학계와 정부뿐 아니라 파운드리에도 MPC 개념을 제안하며 새로운 비즈니스모델(BM)을 고안하고 있다. 조만간 마스터 플랜이 나올 것이다.
-팹리스도 다른 반도체 산업과 마찬가지로 인력 확보에 어려움이 많다. 팹리스는 특히 고급 전문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팹리스 산업의 인재 양성과 확보의 방법론을 제시한다면.
▲팹리스 업체는 석·박사급 고급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석·박사 출신 설계 전문 인력을 구하기 쉽지 않다. 기존 반도체 인력 양성은 소자나 공정 쪽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반도체 설계는 하드웨어(HW)보다는 소프트웨어(SW) 역량을 높이 사기 때문에 현재 반도체 인력 양성과 조금 결이 다르다고 본다.
협회는 반도체공학회와 협력, '한국팹리스 설계 센터'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최소한 연간 500명 이상 설계 전문 인력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협회 노력만으로는 어려움이 있다. 국가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핵심을 담당할 '인재 양성' 차원에서도 정부 차원 지원이 시급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도 필요하다.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 지원으로 교수들의 깊이 있는 연구와 성과(우수 논문)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해당 분야 고급 전문 석·박사 인력이 배출되는 선순환 구조를 확립할 수 있다.
-한국팹리스산업협회 초대 회장을 맡게 됐다. 어떤 포부를 가지고 있나. 내년 주요 사업 계획도 공유한다면.
▲초대 회장직을 맡아 영광스럽고 한편으로 어깨가 무겁다. 협회 설립 초기다 보니 할 일이 많다. 먼저 팹리스 산업 중요성과 건강한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많이 노력하겠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팹리스 산업을 육성하고 관장할 전담 부서를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낼 것이다. 반도체 칩 개발 관련 정부 연구개발(R&D) 과제 예산의 50%를 '기업 자유공모 과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의견을 개진하겠다. 팹리스 업체가 경쟁력 있는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MPC 사업 관련 1000억원 이상 규모 바우처를 신설, 팹리스 업체 기술과 제품 개발 활성화에 기여할 계획이다. 협회를 중심으로 정부 지원 전략을 제대로 수립할 수 있도록 업계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다양한 대정부 활동으로 업계 목소리가 정부 정책과 기획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대 의회 활동으로 팹리스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법안을 제안하는 것도 주요 사업 계획이다. 또 협회 회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완성품 업체와 기술 교류도 활성화할 예정이다.
◇이서규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
서강대 물리학과를 졸업, 포스텍 대학원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 LG전자에 입사해 1985년부터 1999년까지 LG전자 CCD 연구개발실장을 역임했다. 2000년 이미지센서와 이미지신호처리(ISP) 솔루션을 개발하는 픽셀플러스를 설립해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2004년 은탑산업훈장, 2012년 글로벌 IT CEO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21년 국내 팹리스 기업 네트워크인 '한국시스템반도체포럼'이 한국팹리스연합회로 이름을 바꿀 때부터 회장을 맡았다. 올해 8월 한국팹리스산업협회가 출범하면서 초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