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355〉아키텍처에 서 보다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355〉아키텍처에 서 보다

아키텍처(architecture). 어느 사전은 이것에 건축, 건축 양식, 컴퓨터 시스템 구성이라는 설명을 붙인다. 이건 아르키테크톤(arkhitekton)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왔다고 하는데 추장이나 명인을 뜻하는 아르키(arkhi)와 목수를 뜻하는 테크톤(tekton)의 조합이다.

따라서 의미로만 보면 아르키테크톤은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을 총괄하는 마스터 빌더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 따르면 이건 훗날 건축학이란 의미의 라틴어 아르키테크투라(architectura)가 되었다가 영어로도 수용됐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보면 아키텍처는 단순히 건물의 형태·모양·구조만 의미한다기보다는 이걸 디자인하고 건축한 명인의 미학과 철학도 담는다고 할 수 있다.

혁신을 구성하는 주제는 다양하다. 그 가운데 다른 여러 주제를 덮는 우산 같은 개념도 있다. 그 가운데 빼놓으면 안 되는 것에 아키텍처 혁신이란 것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것이 감흥을 제대로 즐기려면 리베카 헨더슨과 킴 클라크 두 석학에게 기대야 하겠지만 요지만 간단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반도체 공정 가운데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가 있다. 반도체 기판 위에 회로를 그려 넣는 광학 공정쯤 된다. 이 과정에서 웨이퍼(wafer)와 일종의 조리개 역할인 마스크(mask)는 서로 잘 정렬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장비의 선두 주자가 매번 바뀐다. 한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가 공정이 나오면 별안간 손바뀜이 이뤄진다. 한때 코빌트가 장악하던 시장이 캐스퍼로 바뀌었다가 다시 캐논, 퍼킨-엘머, GCA, 니콘으로 매번 뒤집힌다.

상업적으로 사용된 첫 공정은 접촉 방식이었다. 웨이퍼와 마스크가 접촉한 상태에서 전사가 이뤄졌다. 이 시기의 선도기업은 캐스퍼였다. 그러다 캐논이 비접촉식 공정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 비접촉식 공정은 사실 급진적 기술 변화가 아니었다. 구조 변경은 미미했고, 서로 호환성이 있었다. 그런데 캐스퍼는 캐논의 비접촉식 정렬기가 일반화될 때까지 이 크지 않은 차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캐스퍼 정렬기의 판매량은 계속 감소하다가 결국 1981년에 업계를 떠난다.

무엇이 이런 실패와 무력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알려진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키텍처이다. 캐논의 정렬기가 구조상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는 점이 바로 함정이었다. 캐논 것을 본 캐스퍼의 첫 반응은 바로 카피라는 한마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캐스퍼는 비접촉 정렬을 위해 비슷한 듯 보이는 구조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캐스퍼는 자신의 정렬 장치를 조금 수정해서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캐스퍼의 정렬 성능은 비접촉 전사를 가능하게 하는데 불충분했다. 학자들은 캐스퍼가 접촉식 정렬 장치를 통해 축적한 아키텍처 지식이 새 기술의 결정적인 해결책이 되는 새로운 문제에서 주의를 집중시키지 못하게 했다고 본다.

클레이턴 크리스텐센의 유명한 '이노베이터의 딜레마'가 와해성 혁신 사례로 삼던 컴퓨터 하드디스크 드라이버(HDD)에 일어난 사건도 이 반도체 공정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얼마 전 한 기사엔 테슬라의 구조를 들여다본 어느 일본 자동차사의 결론은 “테슬라와 같게 하려면 다른 제조철학으로 설계된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테슬라는 이 시장에서 꽤 버텨낼 테다.

왜냐하면 이 아키텍처에 손대는 것만큼 칼날 끝에 서는 모험도 없기 때문이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