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변곡점에서 선 화학산업, 굴뚝 내리고 연금술 얹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
전윤종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

우리나라는 글로벌 제조강국이다. 반도체, 배터리 같은 첨단산업부터 자동차, 철강 등 전통 부문까지 제조 경쟁력을 두루 갖췄다. 대략 2세대 만에 경이적 성장을 이룬 'K-제조업'은 1964년 준공한 울산 정유공장으로 대표되는 화학산업에서 시작했다. 영어로 화학은 '케미스트리(chemistry)'인데, 납으로 금을 만들려 했던 연금술(alchemy)과 동일한 어원이다. 화학이란 용어에 내포된 '마법 같은 기적'을 한국 화학산업이 지난 60년간 이뤄냈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7%를 차지하며, 생산·부가가치·수출 등 국민경제기여도 측면에서 5대 산업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며 '캐시카우' 산업으로 등극했다.

그럼에도 화학산업의 상징인 공장의 높이 솟은 굴뚝은 대기오염과 탄소가스 배출의 주요 원인처럼 여겨지고 있다. 패권 경쟁과 탄소중립에 따른 경제의 구조적 전환과 고유가와 고금리, 경기 위축이라는 시장 주기적 변동 요인으로 우리 화학산업은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앞으로 10년이 기후 위기 대응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경고에 국내외 친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화학산업은 중대기로에 놓였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여부에 따라 전자업계 기업 생사가 갈렸던 것처럼, 그린 전환은 화학업계 생존 관건이 될 것이다. 이제 변곡점에 서 있는 화학업계가 탄소중립을 기회로 반전시키며 새 모멘텀을 찾아 혁신 성장을 모색해야 할 때다.

이러한 세기적 도전에 화학산업계가 응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3월 하순에 '화학산업 포럼 2023'을 출범시켰다. 정부와 산학연이 총결집한 포럼은 석유화학, 정밀화학, 플라스틱 등 화학산업 전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 전략을 수립하고 이행해 나갈 예정이다.

석유화학산업의 밸류체인은 원유를 생산하는 '업스트림(Upstream)'과 원유를 정제하고 가공·판매하는 '다운스트림(downstream)'으로 구분된다. 국내 대부분 업체는 '다운스트림'에 속한다. 우리는 산유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제조 기술과 규모의 경제효과를 활용해 굳건한 세계 5위 석유화학 수출 강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국제유가 인상,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업황 악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도입되면서 2026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수출에 큰 타격을 받는다. 공정 단계마다 탄소량을 측정해 실질적 탄소배출 저감을 실천하고, 석유화학 무탄소 연료 기반 나프타분해시설(NCC) 공정 기술, 바이오매스 활용 원료 대체기술 등 혁신적인 연구개발도 확대해야 한다.

정밀화학산업은 제조업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소재를 생산한다. 치약에서부터 커피 용기, 빨대, 스마트폰, 자동차 등에 이르기까지 그 분야가 다양하다. 정밀화학 제품은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이며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이 요구된다. 기존 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우리의 정밀화학업계는 20개가 넘는 협·단체로 분산돼 있어 통계 등 현황 분석이 미흡하고, 기술 수준도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그러나 정밀화학은 기술혁신과 신제품 개발로 새 시장 개척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특성도 있다. 반도체, 이차전지, 신재생, 모빌리티 등 신산업에서 새롭게 열리는 시장에 특화된 신소재 개발과 기존 물질 성능 제고를 획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런 배경에서 정부는 올해부터 4년간 반도체·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분야를 중심으로 '국가 필수 전략기술 고도화를 위한 고부가 정밀화학 소재 개발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플라스틱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플라스틱 빨대다. '원하는 모양으로 쉽게 만들 수 있다'라는 어원처럼, 플라스틱은 쉽게 만든 만큼 쉽게 버려진다. 플라스틱 업계가 친환경 생존전략 일환으로, 폐플라스틱 리사이클과 함께 생분해성 플라스틱 제품 개발에 나서며 친환경 기업으로 체질 개선에 더욱 힘써야 한다. 국내외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임팩트북의 산업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생분해 플라스틱 시장은 2020년 123만톤 규모에서 2025년 180만톤까지 늘어나며 연평균 8%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리 화학업계는 폐플라스틱의 화학적 재활용과 함께 미생물에 의해 생분해되는 바이오 플라스틱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제는 범용 플라스틱 가공 산업에서 생분해성 플라스틱,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등 고부가 가치 플라스틱 산업으로의 재편 전략을 더욱 심도 있게 추진해야 한다.

이처럼 화학산업은 기후변화가 전 지구적 위기로 부상하면서 다른 어떤 업종보다 패러다임 전환을 거세게 요구받고 있다. 정부는 화학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올해부터 8년간 '탄소중립 산업 핵심기술 개발사업'을 수행한다. 2050 탄소중립을 차질없이 이행하기 위해 제반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화학산업에서 탄소가스를 내뿜는 굴뚝을 내리고 연금술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개발이 긴요하다.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산티아고는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면, 전 우주가 도울 것이다”라며 되뇐다. 석유화학, 정밀화학, 플라스틱 등 화학업계의 산학연 모두가 하나가 되어 힘과 지혜를 모은다면, 탈(脫)탄소 그린 전환, 초격차 기술개발, 시장 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이뤄가는 한국 화학산업 르네상스가 펼쳐질 것이다.

[ET시론] 변곡점에서 선 화학산업, 굴뚝 내리고 연금술 얹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 art@keit.re.kr

〈필자〉

전윤종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은 정책·경제·통상 분야에 두루 능통한 관료 출신 기관장이다. 군산제일고, 서울대 경제학과, 영국 리즈대 경영대학을 졸업했다. 행정고시 36회에 합격, 1993년 상공자원부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지식경제부 투자유치과장, 산업통상자원부 정책기획관·통상협력국장·통상교섭실장 등으로 활동했다. 주유럽연합(EU)·벨기에 대사관 상무관, KOTRA 교역지원센터장, KAIST 과학기술정책센터 연구교수 등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지난해 9월부터 R&D 기관 KEIT에서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취임사에서 KEIT를 '혁신성장 촉진자' '산업 대전환 견인차'로 거듭나도록 바꾸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