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팹리스는 빈사 상태입니다.”
잇따른 국내 반도체 설계(팹리스) 회사의 중국 매각을 두고 업계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국내 팹리스 다수는 오랫동안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사업을 영위하기 어려울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 이때 등장한 중국 자본은 '하늘에서 내려 온 동아줄'이다. 매력적인 수준을 넘어, 유일한 돌파구이자 생존 방법이다.
국내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와 대기업 중심으로 짜여, 중견·중소 기업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다. 그러다 보니 기업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는커녕 투자를 받기도 어렵고,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는 악순환을 이어왔다.
◇적자 늪에 빠진 한국 팹리스...제품 개발할 여력도 없다
최근 팹리스 업계 화두는 인공지능(AI)이다. AI 반도체 스타트업이 1000억원 안팎 투자를 유치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국내 시스템 반도체 미래 먹거리라고 주목받는다. 정부 지원도 AI로 몰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K-클라우드 추진 전략'이 대표적이다. 세계 최고 수준 AI 반도체 기술 확보에 2030년까지 8262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AI 반도체 팹리스는 극소수다. 우리나라 팹리스 수는 약 200여개로 추산되는데 AI 반도체 팹리스 비중은 5% 미만이다. 업계에서 정부 지원이 일부에만 국한됐다고 평가하는 배경이다.
대부분 팹리스는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상장사 중에서도 이익을 내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전자공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상장한 주요 팹리스 25개사 가운데 4분기 흑자 기업은 절반 정도다.
한국팹리스산업협회 고위 관계자는 “국내 팹리스 전체 중 수익을 내고 있는 기업은 30% 정도로 추산된다”며 “대부분은 몇 년째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돈을 벌지 못하니 연구개발(R&D) 투자도 쉽지 않다. 반도체 설계는 인력 싸움이다. 첨단 공정으로 전환될 수록 투입되는 설계 엔지니어 수가 급증한다.
여력이 없는 팹리스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R&D 동력을 잃게 된다. 결국 신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경영이 악화일로에 빠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반도체 굴기 완성하려는 중국, 자본으로 한국 팹리스 노려
취약한 국내 팹리스 환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매년 정부가 시스템 반도체 육성을 천명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십수 년이 지났다. 메모리와 비메모리, 즉 시스템 반도체의 불균형은 국내 반도체 산업 내 치명적 약점으로 남아있었다.
이 틈을 중국이 파고들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견제를 극복하기 위해 전방위로 기술을 확보하는 중이다. 자체적인 반도체 자립과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첨단 공정용이 아니더라도 레거시 공정 장비를 최대한 매입하거나 패키지로 반도체 미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식이다.
이런 가운데 기술력과 사업 노하우는 있지만 성장에 한계를 보이는 한국 팹리스는 중국의 인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기술을 원하는 중국과 기업 가치를 인정받길 원하는 한국 팹리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정부 지원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반도체 자립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2014년 1387억위안(약 26조7000억원) 규모 반도체 육성 펀드를 조성했으며, 반도체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2019년에는 2042억위안(39조3000억원) 규모 펀드를 만들었다. 이들 자금이 한국 내 투자나 기업 인수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업체들은 판교나 정자 등에 법인을 세우고 한국 엔지니어들을 고용하면서 반도체 기술을 연구개발(R&D)하고 있다. 인력을 중국으로 데려가던 스카우트 방식과는 다른 기술 확보 시도다. <본지 3월 2일자 1·3면, 3월 28일자 1면 참조>
◇중국 자본, 걱정은 되지만...팹리스 업계 “일단 생존부터”
국내 팹리스 업계도 해외 매각이 달갑지 않다. 특히 기술 패권 경쟁이 한창인 가운데 중국에 회사를 팔거나 자본을 유치하면서 겪을 문제도 경영 리스크다.
그러나 생존이 걸려 있기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체 대표는 “대기업들은 수직계열화를 하거나 공급 업체를 이원화, 삼원화하면서 원가를 절감하는데 협력 업체들은 해외 판매를 제한하니 어떤 기업이 살아 남을 수 있겠느냐”면서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를 인정해주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팹리스 대표들 사이에서는 '회사가 망해서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보다 중국에 회사를 매각하는 것이 낫다'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 자본은 국내 팹리스 기업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자금력도 있고, 중국 내수에만 팔아도 성장성이 있으니 기업 인수에 비용을 치르더라도 부담이 적다. 국내 대비 2~3배 높게 기업 가치를 인정받는 사례도 있다. 중국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번도체 업계 관계자는 “작년 하반기부터 불황으로 팹리스가 직격탄을 맞았다”며 “중국 매각이나 투자 유치를 고려하는 회사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 메모리가 세계 1등이라는 점에 취해, 국내 비메모리 및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현실을 외면한 정책이 가져온 부메랑이란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팹리스가 스스로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채 정부 지원만 바라본 결과라는 비판도 있다. 경쟁력 자체가 뒤처지는 데 계속 지원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산소호흡기라도 꽂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것이 팹리스 업계의 주장이다. 하나둘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전체가 붕괴할 것이 자명해 국내 반도체 산업을 위해서라도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업체 대표는 “정부 R&D 과제 사업비라도 받아야 사람도 뽑고 제품 개발도 추진할 수 있다”며 “이 또한 일부 기업만 수혜를 받고 연속성이 떨어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실적 있는 기업만 과제 선정에 좋은 평가를 받아 R&D 지원의 '빈익빈부익부'가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서규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은 “정부가 다양한고 실효성 있는 팹리스 육성 전략을 마련해야한다”며 “민관이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중국 등 해외와 경쟁해 생존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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