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상이 12년만에 재개된 ‘셔틀외교’에서 안보와 첨단산업, 과학기술 등 전방위적 협력을 강화했다. 반도체 분야에선 우리나라의 앞선 생산 능력과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능력을 접목해 견고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기로 했고,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해선 우리 전문가를 현장 시찰단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7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100여분간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혔다.
한일 정상은 우선 경제협력을 심화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의 반도체 제조업체, 일본의 소부장 기업간의 협력을 통해 견고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도록 공조를 강화하자는데 의견을 일치했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우주와 양자, 인공지능(AI), 디지털, 바이오, 미래소재 등 첨단과학기술 공동연구와 연구개발(R&D) 협력도 추진키로 했다.
또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 우리나라 전문가의 현장시찰단 파견에도 합의했다. 기시다 총리는 “한국 국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는 점은 잘 인식하고 있다. 한국 분들이 이 사안에 대해 이해해 주실 수 있도록 이번 달에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에 대한 한국 전문가 현장시찰단의 파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며 “일본의 총리로서 자국민 그리고 한국 국민의 건강과 해양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는 형식의 방류는 인정하지 않을 것을 말씀드린다”고 했다.
일본이 그동안 요구해온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문제는 이번 정상회담 의제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해당 논의는 오가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한일 미래세대 교류확대를 위한 민관 차원의 협력 강화와 함께, 수도권 뿐 아니라 지방간 항공노선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키자는데도 합의했다.
특히 양 정상은 이달 중순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일 간 긴밀한 소통과 협의를 하자는 데 공감했다.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북한 미사일 경보 시스템에 대한 실시간 공유와 관련해서도 당국 간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환영하고 한미일 3국의 안보협력을 이어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한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된 한미간 핵협의그룹(NCG)에 일본이 참여할 수 있느냐는 기자 물음에 “일본 참여를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이는 원론적 수준의 답변이라는게 대통령실 설명이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NCG는 한미 간 일대일, 집중적인 고위급 상설 협의체이기 때문에 어떻게 변화시키거나 바꿀 의향이 없다”고 했다.
과거사 문제도 언급됐다. 기시다 총리는 기자로부터 관련 질문을 받은 뒤 “역대 일본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입장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죄’와 ‘반성’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견임을 전제로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이 힘들고 아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앞선 회담에서도 이러한 취지의 언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한국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거나 요구한 바가 없는데 먼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줘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 일본 총리의 방한은 2011년 노다 요시히코 총리 이후 12년 만이다. 일본 총리가 우리나라를 방문해 현충원을 마지막으로 참배한 것도 노다 총리가 마지막이었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첫 공식 일정으로 부인 유코 여사와 함께 현충원을 참배했다. 현충원은 순국선열과 독립운동가 등 애국지사 등이 안장돼 있다.
기시다 총리 방한은 실무방문으로, 윤 대통령의 지난 3월 16∼17일 일본 실무방문에 대한 답방이다. 국빈이나 공식 방문보다 낮은 단계인 실무 방문 형식이지만 의장대 사열 등을 포함한 환영식은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공식방문 못지않은 규모로 이뤄졌다.
윤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는 정상회담 후 관저에서 기시다 총리 부부와 친교 만찬을 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날 만찬은 전국의 특산품으로 요리한 한식으로 준비됐다. 구절판, 잡채, 탕평채, 한우 갈비찜, 우족편, 민어전, 한우불고기, 자연산 대하찜, 메밀 냉면 등이 메인 메뉴로 만찬 테이블에 올랐다.
강원도 횡성한우로 갈비찜, 우족편, 한우불고기를 만들었으며 대하찜은 충남 태안에서 잡은 신선한 자연산 대하를 썼다. 잡채는 충청도 버섯, 제주도 당근과 부추 등이 들어갔다. 목표 민어를 쓴 민어전은 한국식 양념장과 곁들여 냈다. 기본 찬은 백김치, 물김치, 더덕구이, 담양죽순 등이 나왔다.
만찬주는 ‘경주법주 초특선’이었다. 쌀 표면을 79%깎아내 깨끗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으로, 천년고도의 명주로 불리며 한국 청주 중 최고로 꼽힌다. 사케를 선호하는 기시다 총리의 취향을 감안한 선택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8일 우리 정치인들과 경제 단체를 만나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 회장(대한상의 회장)을 비롯한 재계 총수와의 만남이 성사될지도 주목된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