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는 중국 시안공장을 두고 '진퇴양난'에 놓였다. 반도체 시황 변화로 시안공장에 첨단 공정 도입 필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규제와 상충해서다.
◇128단 줄여야 하는데...
삼성전자는 최근 평택 1공장(P1) 낸드플래시 생산라인을 128단(V6)에서 236단(V8) 공정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경기 침체와 수요 감소로 재고가 쌓이고 있는 128단 낸드 생산을 줄이고 앞으로 수요가 늘어날 236단 낸드 공급을 위해서다. 낸드플래시의 단수는 셀을 적층한 수로, 숫자가 높을수록 용량이 늘어난다. 〈본지 8월 30일자 2면 참조〉
지난해만 해도 128단 낸드는 인기 제품이었다. 업계에 따르면 128단이 지난해 전체 낸드 수요의 50%를 차지했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 수요 감소에 따라 낸드플래시 재고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특히 128단 재고가 최고치를 찍었다.
삼성전자는 이에 최후의 보루인 감산 카드를 꺼내들었다. 평택 1공장 공정을 128단에서 236단으로 전환하고, 중국 시안공장 가동을 줄인 것이다. 공정 전환 때는 장비를 교체하기 때문에 감산 효과가 나타난다. 가동을 줄이면 공급량이 감소한다.
시안 공장은 128단 낸드를 생산하는 곳이다. 삼성은 128단 낸드 재고가 높아 시안공장 가동률을 최근 20% 수준까지 떨어뜨린 것으로 전해졌다.
◇미·중 갈등에 낀 '시안 팹'
128단 낸드 수요 급감에 시안도 평택 1공장처럼 공정 전환을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다. 통상적이었다면 공정 전환 투자가 이뤄졌겠지만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갈등이 문제다.
미국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자국 첨단 반도체 칩과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14나노 이하 로직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첨단 장비 반입을 금지시켰다. 쉽게 말해 퀄컴의 통신칩,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의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 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다. 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1년간 유예를 뒀다. 바이든 정부가 추진 중인 미국 반도체 제조 부활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필요해서다.
표면적으로는 장비 반입 규제 유예로 삼성전자가 중국 시안공장을 첨단 공정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추진하기에는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다. 규제 유예 종료 시점이 다가오는 데다, 다시 유예가 연장된다 해도 언제 또다시 새로운 장애물이 생길지 모른다. 특히 미국이 대중국 반도체 압박 강도를 높여가고 있는 상황이어서 삼성으로서는 선뜻 중국에 첨단 공정을 투자하기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서슬 퍼렇게 지켜보는데 첨단 공정을 중국에 구축할 수 있겠느냐”면서 “삼성으로선 결정이 쉽지 않을 것이고 시안은 레거시 공정으로 남길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레거시 공정이란 성숙 공정, 즉 기존 세대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란 의미다. 최신 기술로 공정을 전환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해서 128단 낸드 생산라인으로만 남길 것이란 분석이다. 기술 발전과 시장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공정 전환이 필요하지만 미·중 갈등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시안공장 낸드 투자는 서서히 줄여나가는 '페이드아웃'을 추진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전력반도체가 대안?
삼성전자 전체 매출에서 2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 위상을 고려할 때 시안공장 전면 철수 가능성은 낮다는 게 중론이다. 대신 중국에서 사업 기회를 이어가기 위해 시안공장은 현재 낸드에서 전력반도체 생산라인으로 전환 가능성이 일각서 제기된다. 전력반도체는 상대적으로 첨단 공정이 필요하지 않아 미국 규제와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전력 반도체 사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고 중국 내 전력반도체 웨이퍼나 수요처 등 생태계도 잘 갖춰져 있으니 시안을 전력반도체 기지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중국은 삼성전자가 2025년 양산을 공식화한 질화갈륨(GaN) 전력반도체 소재 원료로 알려진 갈륨·게르마늄 독점 생산국으로 분류된다. 전기차 제조 수요 등 중국 자체가 대형 전력반도체 시장이라는 점도 전력반도체 생산라인 전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중 갈등 심화에 중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을 경계하는 미국 입장을 고려하면 삼성이 시안공장에 첨단 장비를 반입할 가능성은 낮다”며 “중국 공장을 폐쇄할 수도 없기 때문에 현지 수요가 큰 다른 반도체 생산라인으로 전환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박종진 기자 trut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