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공부를 잘했다. 집안이 가난해 학비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가정교사를 하며 전국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명문 경기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릴랜드대학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아 메릴랜드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3년 귀국해 KAIST 전산학과를 신설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79년 가톨릭대학 전산학과 주임교수로 일했다. 친구이자 같은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던 김호길 포스텍 초대 총장(작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89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포스텍 교수로 부임했다. 포스텍대학원장을 거쳐 4대 총장을 역임했다. 통일IT포럼 회장으로 남북한 IT교류의 길을 텄고 김진경 총장과 같이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이명박정부 청와대 과학기술특별보좌관과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박찬모 평양과학기술대(과기대) 명예총장의 이야기다. 올해 80세. 연금으로 편히 지낼 법도 하지만 그에게 은퇴는 없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는 가족과 떨어져 1년 중 6개월은 과기대에서 강의를 하고 3개월은 한국에서, 3개월은 미국 메릴랜드 주 집에서 지낸다.
과기대는 남북한 최초 합작 대학으로 IT협력 주춧돌이다. 100만㎡ 규모에 건물은 17동이다. 북한의 수재(秀才)들만 입학할 수 있다.
과기대 가을 학기를 끝내고 서울에 온 그를 2월 27일 오후 만났다. 절기(節氣)는 봄을 향하고 있었다.
“일부 인사와 언론이 ‘과기대에서 해킹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과기대는 해킹과 무관하다.” 인터뷰는 두 시간여 계속했다.
-북한이 역점을 두는 IT분야는.
“HW보다 SW 분야에 주력한다. 애니메이션과 기계번역, 의학 관련 SW에 치중한다.”
-남북한 IT 분야의 차이점은.
“한국은 HW와 반도체 메모리에 역점을 뒀다. 지금은 IT기반 융·복합과 창조경제가 핵심이다. 북한은 응용SW와 운용체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기대 입학생은 어떻게 선발하며 정원은 몇 명인가.
“대학생은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 원산경제대학, 원산농업대학, 희천공업대학, 함흥공업대학과 같은 중앙과 지방의 좋은 대학에서 1년 혹은 2년간 공부한 학생 중에서 필기와 면접을 거쳐 선발한다. 전공과목 성적이 우수하고 영어를 잘해야 한다. 대학생은 매년 100명을, 대학원생은 30명 내외를 뽑는다. 모든 강의는 영어로 한다.”
대학생은 1년간, 대학원생은 6개월간 영어공부만 한다. 대학생은 영어 성적에 따라 반 편성을 달리 한다고 한다.
-과기대 학생들의 실력은.
“북한에서 최고 수준이다. 학비가 없고 숙식을 제공한다. 매월 학생에게 10달러를 현금이 아닌 전자카드로 지급한다. 매점에서 학용품이나 운동화, 생활필수품을 주로 산다. 북한의 영재학교인 제1고교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다.”
김일성 주석은 생존 시 “머리 좋은 사람은 머리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우수한 인력은 군복무를 면제 받는다. 북한 남자는 군복무기간이 10년이다.
과기대는 2010년 10월 처음 입학생을 모집해 지난해 처음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 대학생은 400명이고 대학원생은 100명이다. 개교 당시 교직원은 20명이었다. 지금은 135명으로 늘었다. 외국 국적 교수는 총장과 명예총장을 포함해 80명이다. 이들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같은 16개국에서 왔다. 교수는 전공과목 교수와 영어와 중국어 같은 외국어 교수로 나눈다. 전공과목 교수는 다수가 박사학위 소지자다. 지난 2011년과 2013년에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1차 대회에는 2003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피터 아그레 미국 존스흡킨스대 교수가 기조연설을 했다. 2차 대회 때는 전직 미국우주인 데이비드 힐머스 박사와 영국 저명한 신경학자 닉 스콜딩 교수가 기조강연을 했다. -전자컴퓨터공학대학 학과는.
“전자공학과, 컴퓨터과학, 산업자동화 학과가 있다. 교육과정은 미국 MIT나 UC버클리와 유사하다. 이론과 실제를 중요시해 응용 위주 교육을 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해킹과 같은 인류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은 절대 안 가르친다.”
-여학생도 있나.
“없다. 기숙사가 없어 선발하지 못한다.”
-학생들은 모두 합숙인가.
“그렇다.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대학생은 네 명, 대학원생은 두 명이 한 방을 쓴다. 건물 안에 대중목욕탕도 있다. 대학졸업생 30%가 과기대 석사과정에 진학한다.”
-학생 하루 일과는.
“아침은 6시 반부터 식당에서 먹는다. 점심은 12시, 저녁은 오후 6시 반에 먹는다. 하루 4교시다. 1교시는 1시간 반이다. 15분 쉰다. 오전 2교시, 오후 2교시다.”
-교수들은 어디서 생활하나.
“교수 아파트가 있다. 내 숙소는 아파트 5층이고 김진경 총장 숙소는 3층이다. 밥은 학생과 같이 먹는다. 식사는 뷔페식이다. 900여명이 먹는다.”
-교수 보수는.
“무보수다. 대학에서 숙식만 제공한다. 기독교 정신이 없으면 어렵다.”
-한국 교수는 없나.
“안타까운 일이다. 북측은 한국 교수를 원한다. 아직 5·24조치가 풀리지 않아 한국국적 교수는 없다. 내 제자의 제자가 외국국적이라서 교수로 와 있다. 그 교수에게 ‘제손(弟孫)’이라고 부른다.”
-과기대 IT 기자재는.
“주로 중국에서 만든 기기들이다. 북한에서 선호하는 제품은 델컴퓨터다. 정품은 AS기간이 1년이고 조립품은 6개월이다. 교수들이 외국에서 사용하다 가지고 온 제품을 활용하기도 한다. 데스크톱은 펜티엄보다 속도가 조금 빠른 아이3를 사용한다.”
-어떤 과목을 강의하나.
“대학원에서 컴퓨터 그래픽과 시스템 시뮬레이션, 가상현실을 강의한다. 과학연구의 윤리문제 특강도 한다.”
-일주일에 몇 번 강의하나.
“3일간 강의한다. 한 과목당 한 시간 반 강의다. 컴퓨터애니메이션과 같이 실제로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 수 있는 교육에 치중하고 있다. 그룹별로 과제를 준다. 지난해 가을학기에는 세 팀에 과제를 줬다. 대학원기숙사 가상탐방, 거북선 구조 및 활약 동영상, 우리말의 가상교육 시스템이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포스텍 학생들에게 ‘지금같이 공부하면 과기대생들에게 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기대 석사 과정을 마친 제자 중 한 명은 스위스에서 클라우드 컴퓨팅을 공부하고 있고 박사과정을 거친 한 명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인터넷은.
“북한은 국내망(인트라넷)과 국제망(인터넷)으로 구분한다. 일반인은 국내망만 연결할 수 있다. 과기대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도서관에 컴퓨터 30대가 설치돼 있다. 이곳만 인터넷사용이 가능하다. 대학생들은 졸업논문을 쓰는 2개월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구글과 유튜브, 위키피디아와 접속한다.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대학에서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준비 중이라고 한다.”
-북한 휴대폰 인구는 얼마로 보나.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300만명으로 추산한다. 초창기에는 이집트 오라스컴사 제품이었으나 지금은 여러 업체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한다. 중국 제품이 가장 많다. 가격은 100달러에서 500달러까지 종류가 다양하나 300달러 제품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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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운영비는.
“전액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연간 30억원 이상이 필요하다. 노무현정부에서 10억원을 지원받았다. 5·24 조치 후 한국 지원은 중단된 상태다.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 단체가 지원하고 있다. 가장 많이 차지하는 비용이 900여명의 식대와 난방비다.”
-남북한 IT분야 협력은.
“남북한이 SW 분야에서 협력하면 경쟁력 있는 우수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뽀로로는 남북합작품이라고 한다. 한국기업이 옌볜 같은 지역에 기업을 설립하고 과기대 졸업생을 취업시키면 좋겠다.”
-정부에 바라는 점은.
“미국은 과학자들의 방북은 허용한다. 한국도 과학자들의 방북을 허용해 주면 좋겠다. 나는 1년에 한두 번 미 국무부에 가서 브리핑을 하는데 과기대 역할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의 좌우명은 고진감래(苦盡甘來)와 외유내강(外柔內剛).
“한국 제자들이 과기대에서 강의를 하면 내가 평양에 갈 필요가 없는데.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노 교수는 그런 염원(念願)을 안고 봄 학기 강의를 위해 3월 7일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