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국내 팹리스(반도체설계) 기업 경쟁 구도가 변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장 성장으로 위기를 맞아 수년간 침체를 겪었으나 자동차, CCTV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각기 살길을 모색하며 재도약 채비를 갖췄다. 국내에 국한됐던 시장도 중국 등으로 영역을 넓히며 해외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상위권 기업 모습도 과거와 달라졌다. TV용 칩을 공급하는 티엘아이와 아나패스가 상위로 도약하고 에이디테크놀로지는 전반적인 업계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실적이 상승했다. 텔레칩스, 코아로직, 넥스트칩, 엠텍비젼 등 과거 업계 상위권에 포진했다가 실적 하락·정체를 겪으며 부진했던 기업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확보했다. 사물인터넷(IoT), 지능형 자동차 등 새로운 시장이 열리면서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기업도 늘었다.
◇TV용 칩 공급사들 상위권 포진
지난해 국내 팹리스 기업 매출 순위를 집계한 결과 2013년에 비해 상위 10개 기업 변화폭이 컸다. 특히 TV 관련 칩을 공급하는 팹리스 약진이 두드러졌다.
실리콘웍스는 2013년에 이어 지난해도 1위를 유지했다. 지난해 6월 LG그룹으로 편입했고 지난 1분기에 루셈에서 칩온필름(COF) 본딩 사업부문을 양수해 올해 TV 부품 사업 규모가 더 커질 전망이다.
2013년 매출 5위와 9위를 기록한 아나패스와 티엘아이는 지난해 2위와 3위로 뛰어올랐다. 각각 삼성전자와 LG전자에 TV용 타이밍컨트롤러(티컨)를 공급하는 주요 협력사다. 풀HD와 초고화질(UHD) TV 비중이 커지면서 하이엔드용 부품 공급이 늘어 실적이 상승했다.
2위였던 픽셀플러스는 실적이 1494억원에서 1239억원으로 줄어 순위가 4위로 하락했다. 지난해 중국을 중심으로 CCTV용 CMOS 이미지센서(CIS)를 공급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현지 경쟁사가 저렴한 가격으로 맞불을 놓으면서 영업이익도 크게 하락했다. 올 상반기 기업공개(IPO)를 하고 공격적인 투자와 수출 확대에 나선다.
실리콘화일은 지난해 SK하이닉스 완전 자회사로 편입됐다. 공동설계협력단을 구성하고 공통 개발 로드맵을 마련해 양사 연구진이 함께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고화소 CIS 개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실적은 2013년 1320억원에서 2014년 1113억원으로 줄었고 영업이익도 약 60억원 줄어든 39억원에 그쳤다. 실리콘웍스와 시장 선두를 다퉜지만 지난해 5위로 내려앉았다. 휴대폰과 PC용 센서를 넘어 자동차, 바이오 등 다양한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센서로 개발 영역을 확대할 방침이다.
◇전열 재정비 “다시 시작이다”
지난해 국내 팹리스 업계 실적은 2013년에 이어 전반적으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마트폰 중심 구조에서 탈피해 각자 경쟁력 있는 분야에 집중하고 새로운 시장을 발굴해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의미 있는 제자리걸음’이다.
티엘아이는 센서 전문 자회사 ‘센소니아’를 설립했다. 사물인터넷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수년간 개발해온 낸드플래시 컨트롤러도 올해 양산을 앞뒀다. 유니버설플래시스토리지(UFS)도 중장기 기대 품목이다. 높은 기술 장벽, 대기업 위주 시장이지만 자체 기술로 도전장을 던졌다.
텔레칩스는 지난 7년간 매출 700억원대에 머물며 영업 손실도 냈지만 침체기를 견디며 자동차용 반도체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MP3플레이어 등 휴대기기용 멀티미디어칩과 모바일 기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위주에서 자동차 인포테인먼트용 칩 위주로 매출군이 완전히 바뀌었다.
중국 시장이 아닌 유럽과 북미 등 선진 시장을 중심으로 셋톱박스용 칩 공급도 목표했다. 자동차용 칩은 인포테인먼트를 넘어 텔레매틱스,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등으로 분야를 넓힌다. 사물인터넷 시장에 대응할 새로운 기술도 찾고 있다. 올해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1000억원대 매출 돌파 가능성도 보인다.
이장규 텔레칩스 대표는 “진입 장벽이 높은 선진 시장, 기술 장벽이 높지만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분야를 전략적으로 택했다”고 말했다.
아나패스는 미국 GCT세미컨덕터 지분을 인수한 뒤 함께 AP와 모뎀칩을 통합해 공급하는 사업을 새롭게 준비 중이다. 디스플레이용 칩 중심에서 모바일로 새로운 진출을 기대하고 있다.
회사 설립 후 줄곧 한 우물을 파온 기업의 약진도 눈길을 끈다.
동운아나텍은 휴대폰용 자동초점(AF) 구동칩으로 성장해 올해 기업공개(IPO)에 나선다. 지난해부터 거대한 중국 시장에 영업을 집중하고 있다. AF 기술력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디스플레이구동칩 등 다른 분야 사업도 고른 성장을 꾀한다.
넥스트칩은 꾸준히 일궈온 영상보안용 칩 시장에서 재도약을 시작했다. 지난해 연간 영업 손실 26억원이 발생했지만 4분기부터 분기 흑자를 기록했다. 올해 연간 흑자를 자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대 실적 기록도 깰 것으로 예측했다.
부진을 털고 일어난 핵심은 독자적인 아날로그HD(AHD) 기술이다. 기존 아날로그 CCTV의 동축 케이블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디지털 수준의 HD급 고화질 영상을 전송할 수 있다. 별도 대규모 설비투자 없이 아날로그 CCTV를 디지털 CCTV로 전환하는 효과를 제공하는 ISP다. 중국을 중심으로 신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위더스비젼과 합병 1년을 맞은 지니틱스도 새로운 제품을 준비 중이다. 지니틱스의 터치 컨트롤러, 위더스비젼의 햅틱·오토포커스 기술을 결합한 시너지를 올해부터 내겠다는 전략이다. 합병 직후 공급하는 제품군이 늘어나 영업 효율성이 좋아졌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중국이 좋은 품질을 저가에 공급하며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 한국 팹리스 기업이 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발굴해 공략하는게 생존 전략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춰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략적 인수합병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팹리스 업계 부진이 길어진 만큼 올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확실히 다져야 한다”며 “올해 탈출구를 마련하지 못하면 재기하기 힘들다는 위기감이 크다”고 전했다.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