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14>주대준 선린대 총장(전 청와대 경호차장)

주대준 선린대 총장은 “사이버보안청을 신설하고 관련제도와 법을 재정비해 사이버보안강국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윤성혁기자 shyoon@etnews.com
주대준 선린대 총장은 “사이버보안청을 신설하고 관련제도와 법을 재정비해 사이버보안강국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윤성혁기자 shyoon@etnews.com

사진=윤성혁기자 shyoon@etnews.com

열 살 때 고아(孤兒)가 돼 고아원과 친척집을 떠돌았다. 역경과 마주치면 ‘왜 내가 못해’라는 도전정신으로 인생 그릇 크기를 키웠다. 막노동을 하며 야간고교를 다녔고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컴퓨터 시스템관리 석사와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청와대 프로그램개발팀장으로 경호실에 들어가 처장과 본부장을 거쳐 사상 처음 두 정부에서 경호차장으로 근무했다. 경호시스템을 전자화·과학화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정년 퇴임 후 “낙하산 자리는 싫다”며 인생 2막을 KAIST 교수로 시작해 7개월 만에 부총장으로 발탁됐다. 지난 2월부터 지방 상아탑 수장(首長)으로 재직 중이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승리의 표상(表象)이라고 말한다.

주대준 선린대 총장의 삶은 드라마보다 극적(劇的)이다.

주 총장을 지난 4월 23일 오후 5시 10분 서울역 3층 귀빈실에서 만났다. 그는 대학이 있는 경북 포항에서 KTX편으로 서울로 오는 길이었다.

그를 만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5월 청소년의 달을 맞아 미래주역인 청소년에게 주는 메시지가 궁금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사이버보안 전문가인 그에게 사이버 위기 대응책을 듣고 싶었다.

그는 고생한 사람답지 않게 얼굴에 주름살도 없고 표정은 밝았다.

“내가 어린 시절 고아로 고생한 걸 알면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나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가 열 살 때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빚쟁이에게 시달리던 어머님도 이듬해 돌아가셨다. 3남 2녀 맏이인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고아원과 친척집을 떠돌았다. 고아원에서 기득권이란 걸 50년 전에 체험했다. 다른 고아들이 “저 애가 우리 밥그릇을 빼앗아간다”며 이방인 취급을 했다.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고학으로 야간인 대구 성광고등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양복점과 하도급공장, 소방서 사환, 공사판에서 일했다.

고교 3년 때 경북 구미 전자공단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그때 정보화가 국가의 미래임을 예감했다. 앞으로 세상을 IT가 바꾼다고 생각했다. 막노동을 하며 미래 정보화 사회에 대한 꿈을 가슴에 품었다. IT와 인연은 그렇게 싹이 텄다.

고교 졸업 후 신분상승을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려고 대구 인근에 있는 용연사에 들어갔다. 머리를 깎고 눈썹까지 밀며 1년간 공부했으나 불합격했다.

“1년간 절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느낀 점이 많았다. 중국에 모소대나무라는 게 있다고 한다. 4년간 총 3㎝ 정도 자라고 5년이 지나면 하루 30㎝씩 자라 6주 만에 15m가 된다는 대나무다. 고시공부 1년이 내 삶이 급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군 입대 통지서가 나오자 그는 1974년 7월 육군3사관학교에 입교했다. 최전방 소대장을 거쳐 대위로 3사관학교 교수부에 근무했다. 마침 국방부에서 전산장교를 모집했다. 지원서를 냈으나 3사관학교장(정형택 중장)이 결재를 하지 않았다. 서류 접수 마감 전날 학교장은 서울로 출장을 가고 없었다. 그는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 국방부 근처 삼각지 한 다방에서 전화번호부에서 학교장과 같은 이름을 찾아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21명이 같은 이름이었다. 전화를 계속하다 17번째로 학교장 집을 알아냈다. 연희동이었다. 집에 찾아가 기다렸다. 자정 무렵 학교장이 귀가하자 ‘국방정보화를 담당할 전산장교 시험을 볼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건의했다. 학교장이 그 자리에서 학교 부관참모에게 전화해 ‘주 대위가 시험 치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교육 후 국방부 직할 정보사령부 전산실 프로그램 장교로 발령받았다. 그곳에서 북한군 전투서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는 정부전자계산소에서 8주간 프로그램 실무보수 교육을 받았다. 이때 먼발치에서 청와대를 보고 “언젠가 저곳에서 근무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는 군 생활 중 고려대 경영학과에 편입해 주경야독을 계속했다. 1984년 4월부터 2년간 미 해군대학원(NPS)에 유학 가서 컴퓨터시스템관리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사진=윤성혁기자 shyoon@etnews.com
사진=윤성혁기자 shyoon@etnews.com

그는 소령으로 진급해 귀국 후 육군 전산처장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중령 진급 예정 자리였다. 그는 전산장교이자 인사, 교육 업무까지 담당했다. 그는 1989년 미국 박사과정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가지 못했다. 그 해 청와대가 전산실을 설치하고 프로그램개발팀장을 한 명 모집했다. 각 군에서 잘나가는 인재 50여명이 지원했지만 그가 최종 합격자로 뽑혔다.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큰 교훈을 그때 얻었다.”

그는 청와대 근무 시 박상범 당시 경호실장(보훈처 장관 역임)에게 “청와대 보안담장이 무너지면 안 된다. 경쟁력을 갖도록 해 달라”고 건의에 KAIST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경호실에 신기록을 남겼다. 전산실과 통신처를 통합해 정보통신처로 출범할 때 예상을 깨고 그가 초대 처장으로 발탁됐다. 이어 노무현정부에서 정보통신처와 행정처가 통합할 때 초대 IT행정본부장을 맡았다. 그는 노무현정부에서 경호차장으로 승진했다.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바뀐 이명박정부에서도 차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이 대통령이 “주대준 차장은 최고 IT 전문가다. 절대 자르지 마라. 사이버보안을 책임지고 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는 경호실에서 전산과 통신, 행정, 경호 분야를 두루 경험했다. 그는 2008년 12월 경호실 근무 20년이 되는 해 정년 퇴임했다. 이 역시 경호실 창설 50년사에 처음 있는 기록이었다.

-5개 정부의 ICT정책을 어떻게 보나.

▲전두환정부는 청와대에 전산망조정위원회를 설치해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노태우정부는 행정전산망사업을 진행했고 김영삼정부는 정보통신부를 출범해 정보통신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김대중정부는 전자정부 구현에 노력했다. 김 대통령은 앨빈 토플러 같은 외국 석학이 전망한 미래에 관심이 많았다. 노무현정부는 인터넷강국을 구현했다. 이명박정부도 방송과 통신융합에 나름의 노력을 했다.

-청와대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노무현 대통령은 IT 지식 전문가다. 언젠가 독대(獨對)했는데 IT 지식이 탁월했다. 노 대통령이 나를 보더니 ‘당신이 주 박사요?’라고 물으셨다. 당시 나는 KAIST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신문에 기사가 났다. 대통령께서 ‘내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네’라며 한 시간여 IT 관련 말씀을 하셨다. 집무실 밖에 비서실장 이하 수석비서관들이 줄 지어 기다렸다. 모두 대통령과 대화내용을 궁금해 했다. 노 대통령은 국정원에 국가사이버안전센터를 만들었다. 2005년 부산 APEC정상회담에서 21개국 정상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분 간격으로 회의장에 도착하는 완벽 경호를 했다. IT를 기반으로 한 유비쿼터스 경호로 정상들의 찬사를 받았다.

-퇴임 후 KAIST 교수로 갔는데.

▲경호실 고위직을 그만두면 대개 정부 산하기관장으로 갔다. 나도 대학이나 ICT 기업체에서 초청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인생 2막을 낙하산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2009년 7·7 DDoS 공격 사태가 발생했다. KAIST에는 해킹동아리만 있었다. 서남표 당시 KAIST 총장이 전산학과 교수직을 제안했다. 2010년 1월 KAIST 전산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서 총장은 실용주의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교수 생활 7개월 만에 600명의 교수 중에 나를 대외부총장으로 발탁했다. 처음엔 극구 사양했다. KAIST 숙원인 사이버보안연구센터 설립과 정보호호대학원을 개설했다. 당시 윤진식 청와대 정책실장(전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만나 ‘IT강국답게 사이버 위기를 극복하려면 전문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며 도움을 청했다. 국회와 기획재정부와 같은 관련 부처를 뛰어다녔다. ‘대한민국 최고 대학인 KAIST에 정보보호대학원이 없는 게 말이 되느냐’고 설득했다. 윤 실장과 임채민 당시 산자부 차관(보건복지부 장관 역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연구센터에서 해킹프로그램 사전 탐지 기술인 사이몬을 개발해 특허등록을 했다. 웹사이트 50만개를 실시간으로 점검해 매주 그 결과를 정부와 공공기관에 배포한다. KAIST에 컨버전스 최고경영자과정을 개설, 책임교수로 활동했다. 2011년부터 10기까지 550여명을 배출했다.

-대학이 지방에 있어 불편하지 않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 선린대는 간호보건계열 특화 학교다. 학생들 표정이 너무 밝다. 학생과 만나면 “파이팅, 왜 내가 못해. 할 수 있다”는 말로 인사를 한다. 학생들이 다 좋아한다.

-사이버보안 강국을 위해 뭘 해야 하는가.

▲사이버전쟁은 지금도 계속 중이다. 청와대에 국가안보실이 있고 국정원에는 사이버안전센터, 미래부 산하에 한국정보보진흥원, 경찰청에 사이버안전국이 있지만 사후 대응체계다. 사이버보안업무를 총괄하는 사이버보안청을 신설해야 한다. 아울러 사이버테러법을 포함한 각종 사이버범죄에 관한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지금은 법체계가 너무 허술하다. 나는 이걸 사이버헌법이라고 하는데 법을 정비해 사이버범죄를 엄중하게 다뤄야 한다.

-청소년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결단하고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다. 꿈이 능력을 키운다. 지난 날 힘들다고 내가 꿈을 포기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다.

-좌우명은.

▲비전과 결단, 도전이다.

-앞으로 꿈은.

▲사이버보안강국 한국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할 생각이다. 국회에 사이버안보 전문가가 있는가. 국회에 입성해 사이버안보 지킴이로 국가 사이버보안 강국 구현에 기여하고 싶다.

그는 유도와 태권도, 특공무술을 합쳐 6단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취미는 글쓰기와 독서. 자신의 삶을 다룬 자서전 ‘왜 내가 못해’와 ‘바라봄의 기적’ 같은 저서를 펴냈다. 주 총장의 인생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현덕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