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장비 업계가 고사 위기에 처하면서 정부와 대기업의 총체적 지원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내수시장 매출 비중이 가장 높은 이동통신사업자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 개척과 공동 연구개발이 요구된다. 중소업체의 노력만으로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글로벌 업계에 대응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업계는 지금도 상황이 어렵지만 4~5년 후에 더 큰 어려움이 닥칠 것으로 전망했다. 5세대(5G) 이동통신이 상용화되면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띨 수 있지만 관련 기술을 미리 개발할 여유가 현재 국내 업체에는 없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국내 통신장비 시장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국산장비 채택 문화 정착돼야
한국네트워크산업협회(KANI)가 지난해 발간한 ‘2013년 국내 네트워크장비 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기관 국산 통신장비 점유율은 17.7%에 불과했다. 업계는 지난해 기준으로도 20% 안팎에 그칠 것으로 추정했다.
이동통신사업자는 중하위 레벨 장비를 도입해 어느 정도 검증이 되면 국산 장비로 교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공기관은 여전히 외산장비 선호도가 높다. 최근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늘어나면서 정부의 공공시장 개입은 더 어려워졌다.
장비업계 한 관계자는 “그동안 정부가 ICT특별법 등 다양한 국산 장비 육성책을 마련해 시행했고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며 “하지만 여전히 국산 장비 사용률은 낮고 이는 국산 장비를 바라보는 공공기관 네트워크 담당자의 마인드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이미 시스코를 비롯한 외산 기업이 장악한 공공 분야에서 섣불리 국산 장비를 도입했다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에는 오랜 기간 글로벌 업체 영업력이 미치고 있어 국내 업체가 파고들 틈새가 없다.
업계 관계자는 “군의 경우 기존 망 연동, 보안 등의 이유를 들어 지난해 진행된 12개 대형 프로젝트 중 국산 장비를 도입한 경우가 2~3개에 불과하다”며 “최근 한 지자체는 국산 업체에 대놓고 외산 장비를 제안해 달라고 하는 등 뿌리 깊은 관행이 업계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공분야에서 국산 장비가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구체적이고 강력한 실행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정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신사, 상생 마인드 절실
국내 통신장비 시장은 통신사 위주로 성장했다. 통신사 발주량이 줄어들면 불황을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업계를 육성하는 데 통신사 역할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의미다.
통신사는 롱텀에벌루션(LTE) 투자가 마무리되면서 설비투자(CAPEX) 줄이기에 나섰다. 예산 절감을 위해 장비 가격을 정상가 이하로 낮추는 등 구매정책에 변화를 주는 곳도 있다. 국내 업계가 고사하면 시스코, 화웨이 같은 글로벌 업체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국산 업체의 위기를 같이 고민하고 지원하는 ‘상생’ 노력이 필요하다.
한 통신장비업계 임원은 “통신사가 과연 국내 장비업계를 같은 생태계에 속한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협력업체가 어려운 데 그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통신사에 무턱대고 신규투자를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CAPEX 대신 운영비용(OPEX)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장비 운영과 유지보수비용을 현실화하면 중소업계가 최소한 고사 상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 주장이다. 국산 통신장비 유지보수요율은 1% 미만으로 최대 8%에 이르는 외산 장비 대비 턱없이 낮다.
5년 후를 대비한 장비 공동개발도 요구됐다. 5G 시대에는 네트워크기능가상화(NFV), 소프트웨어정의네트워크(SDN) 등 차세대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통신사와 중소기업이 손잡고 관련 기술을 개발하지 않으면 외산 업체에 국내 시장을 내줄 수밖에 없다.
◇반도체·LCD 장비분야 벤치마킹반도체, LCD 분야는 정부 지원과 대기업, 중소기업 협력으로 시장을 육성한 대표적 분야다. 10여 년 전 국산 장비 점유율이 미미할 때 미국과 일본에 수조원에 달하는 장비 값을 지불해야 했다.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은 반도체, LCD 분야 기술 중소기업과 장비를 공동 개발하기 시작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증착기(CVD) 장비 개발에 성공해 외산 업체가 점령했던 국내 장비 시장 점유율을 절반 가까이 끌어올렸다. AP시스템, 에이디피엔지니어링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비슷하다. 반도체와 LCD는 측정, 검사장비를 비롯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국산화에 성공했다. 국산 장비 사용이 늘면서 외산 장비 가격이 떨어지는 생태계 선순환 효과가 생겨났다.
통신장비 업계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공동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술 변화가 빠르고 최첨단 기술이 요구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업체 단독으로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가 어렵다. 일부 대용량 제품에서 공동개발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시장 전반에 협력과 상생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는 게 업계 바람이다.
정부 한 관계자는 “정부는 4~5년 후를 바라보고 국내 기업이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과제를 발굴하고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이를 기반으로 통신사와 장비업계가 협력해 차별화된 기술을 개발하는 게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당장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미래 기술력 확보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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