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미국 인텔은 D램 사업에서 철수할 것을 결심했다. 그해 D램 가격이 폭락, 엄청난 손실을 봤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1984년 초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이 본격 생산에 나서자 일본 반도체 업계는 삼성의 세계 시장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덤핑 출하를 불사했다. 가격은 급락했다. 64K D램이 1984년 첫 출하될 당시 개당 가격은 3달러 수준이었다. 1985년 중반에는 이 가격이 30센트까지 떨어졌다. 그야말로 폭락이었다.
미국 정부는 인텔과 마이크론이 피해를 보자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며 일본을 압박했다. 심지어 일본 업계가 D램 생산량을 늘린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미국 행정부는 “증설을 억제해 달라”는 반강제성 요청까지 했다. 당시 한국 메모리 산업 현장에 종사한 한 전문가는 “미국과 일본의 싸움에 한국이 일부 어부지리를 본 게 사실”이라고 회고했다.
미국과 일본은 1986년 가을 이른바 `반도체 협정`을 맺었다. 일본의 모든 D램을 일정 수준, 즉 `공정가격` 이하에 못 판다는 것이 협정의 골자였다.
토종 메모리 업체이던 삼성전자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금성일렉트론(옛 LG반도체, 현대전자로 흡수합병됨)은 미국과 일본이 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무섭게 성장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메모리 업계는 일본보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D램을 팔며 점유율을 높여 갔다.
미국은 가만있지 않았다. 당시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 고위 임원들은 한국을 수시로 방문해 한국의 덤핑 여부를 조사하는 한편 D램 판매가격 인상을 요구했다. 마이크론은 결국 국내 메모리 업체를 대상으로 반덤핑 소송을 걸었고, 그 결과 한국산 D램은 반덤핑 관세를 부과 받았다.
약 25년이 지난 현재 SIA는 중국에 대해서도 동일한 형태의 제재를 가하려 하고 있다. 겉으로는 SIA가 나섰지만 배후에는 미국 정부가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했다.
미국은 중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업체에 연구개발(R&D) 등 명목으로 지급하는 자금이 세계무역기구(WTO)의 보조금 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각국에 동조를 요구하고 있다. WTO는 과도한 보조금 지급이 공정 무역에 지장을 초래할 때 피해를 본 국가가 상계관세 등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다만 과거 일본과 한국의 사례처럼 대놓고 나서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으로 수입되는 중국산 반도체 물량이 많지 않은 데다 인텔이나 퀄컴 같은 자국 기업이 중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은 많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중국 기업이 정부 자금으로 자국 반도체 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 것이다. 칭화유니그룹이 마이크론 M&A를 시도했을 때 미국 정부는 이를 결사 반대했다. 중국 자본이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업체 루미레즈를 인수하려 했지만 이 역시도 미국 정부의 제재로 무산됐다. 미국은 중국이 핵심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면 항공, 우주, 국방 분야에서 위협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중국 제재에 대한 동조 여부를 놓고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조용히 있어야 한다`와 `물밑에서 동조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2000년 마늘 파동 사례(한국이 중국산 마늘 관세를 30%에서 315%로 높이자 중국이 곧바로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중단, 결과 한국의 완패)를 거론하면서 동조하면 절대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중국 디스플레이 산업은 이미 한국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했고, 반도체 역시 메모리 분야에선 커다란 잠재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과의 경쟁관계와 더불어 여러 가지로 득실을 잘 따져 봐야 한다”며 신중론을 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액정표시장치(LCD) 생산량의 경우 조만간 중국이 한국을 뛰어넘고, 메모리 반도체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다”면서 “미국은 멀고 중국은 가깝다”고 말했다. 미국에 동조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한국을 포함한 각국이 미국의 중국 제재에 동조한 이후에는 `걸면 걸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적어도 정부 돈으로 M&A를 무차별 실시하는 것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