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50년]<9> 메모리 반도체 세계 평정… 이젠 우리가 1등이다

1994년 12월 국내 일간지에 게재된 삼성전자의 256M D램 개발 관련 광고. 구한말 태극기가 눈에 띤다.
1994년 12월 국내 일간지에 게재된 삼성전자의 256M D램 개발 관련 광고. 구한말 태극기가 눈에 띤다.

`한민족 세계 제패, 월드베스트 정신으로 해냈습니다.`

1994년 12월 이 같은 글귀가 적힌 전면 광고가 국내 신문에 일제히 실렸다.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했음을 알리는 삼성전자 광고였다. 광고 중앙에는 구한말 태극기 문양이 큼지막하게 담겼다.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 광고의 의미를 “적어도 D램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평등하던 구한말 이전 상태로 돌아갔음을 암시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기자회견장에서는 박수갈채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삼성전자는 1992년에 D램 메모리 시장 매출액 1위 업체로 도약한 상황이었다. 김 부회장의 발언은 기술력에서도 일본을 완전히 눌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대도약의 과정

1990년대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 정상으로의 대도약을 이룬 시기였다. 개발과 양산 실적에서 경쟁국인 일본과 미국을 앞지르기 시작한 때가 바로 1990년대다.

삼성전자는 1989년 10월 일본과 같은 시기에 16M D램을 개발, 동등한 위치에 섰다. 1992년 8월에는 일본보다 빨리 64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1994년에는 256M D램 개발로 드디어 일본과의 격차를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크게 벌려 놓았다.

경쟁사는 256M D램 샘플 제작을 처음부터 시도했다. 그러나 삼성전자 256M D램 개발팀은 이미 상용화가 이뤄진 16M D램에다 256M D램에 요구되는 기술 사양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이 같은 전략으로 당초 예정보다 시제품 생산을 6개월이나 앞당길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제품 개발뿐만 아니라 양산에서도 경쟁사를 압도해 나갔다. 1991년 16M D램의 1세대 상용 샘플(칩 면적 126.7㎟)을 세계 최초로 출하하면서 세계 시장을 선점했다. 1993년에는 2세대 제품(93㎟)을 양산함으로써 2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 세계 시장을 주도했다. 1995년 11월에는 3세대 16M D램(60㎟) 양산에 성공했다. 3세대 16M 제품은 2세대 제품 대비 생산성이 60% 이상 향상됐다. 256M D램에서 사용한 첨단 설계 기술을 과감히 적용한 결과였다.

1994년 8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256M D램
1994년 8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256M D램
1999년 256M D램 세계 최초 양산을 알린 삼성전자 경영진. 왼쪽부터 황창규(당시 부사장), 이윤우(당시 반도체 총괄 사장), 임형규(당시 부사장).
1999년 256M D램 세계 최초 양산을 알린 삼성전자 경영진. 왼쪽부터 황창규(당시 부사장), 이윤우(당시 반도체 총괄 사장), 임형규(당시 부사장).

1994년 12월부터는 세계 최초로 64M D램 양산에 돌입, 1995년부터 본격 형성되기 시작한 64M D램 시장을 선점했다. 그 결과는 대단했다. 1995년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에서 당초 예상보다 40%나 초과한 8조1348억원 매출과 2조7192억원 영업이익이라는 경이로운 실적을 달성한다.

삼성전자는 1996년 10월 `꿈의 반도체`로 불리는 1G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함으로써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제품은 초저전압 구동 설계 기술을 적용, 동작전압 1.8~2.0V의 저전력화를 실현했다. 30나노초(1나노초는 10억 분의 1초)의 빠른 처리 속도를 갖췄다. 머리카락 한 가닥 안에 600개의 가는 선을 그을 수 있는, 당시 초정밀인 0.18마이크로미터(㎛)의 미세가공 기술이 적용된 제품이었다.

후발 주자이던 삼성전자가 이 같은 성과를 달성하기까진 실로 `뼈를 깎는 노력`이 뒤따랐다.

`일레븐미팅`이 좋은 예다. 새로운 반도체를 개발 및 기술 축적할 때 이론 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 현장에서 이뤄지는 실습이었다. 삼성은 반도체 사업 진출 초기 몇 년 동안 매일 밤 11시 개발·생산 인력이 모여서 하루 성과와 진척도 점검, 이튿날 진행 일정을 종합 토론한 뒤 결정하는 일레븐미팅을 실시했다. 기술이 축적되면서 모임 시간은 11시에서 오후 9시, 다시 오후 7시로 앞당겨졌다. 일레븐미팅 초기에는 문제 해결이 주된 과제였다. D램 생산을 위한 수백가지 공정을 하나하나 검토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작업은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양의 인력, 시간, 자금이 소요되는 고된 작업이었다.

1989년 4월부턴 `수요 공정회의`가 시작됐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신제품 개발을 담당하는 반도체 연구소 임원과 연구진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반도체 설계와 공정 기술 개발, 신기술 연구뿐만 아니라 경쟁사 기술 벤치마킹까지 다양한 주제가 논의됐다. 수요 공정회의는 1998년 12월까지 무려 400회나 열렸다.

◇“남과 똑같이 해선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선언한 1983년 회의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 가지 방법뿐이다. 첫째 남도 똑같이 만드는 상품을 누가 가장 싸게 만드느냐, 둘째 값이 똑같다면 누가 가장 품질이 좋은 상품을 만드느냐, 셋째 품질도 다 똑같다면 누가 남보다 앞서 만들어 내느냐. 이런 정신이 없으면 선진국 대열에 끼어 경쟁할 수 없다.”

삼성전자는 이병철 회장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1M D램부터 경쟁국 일본보다 싸게 만들기 시작했고, 4M D램은 동등 품질 제품을 생산했다. 16M D램을 품질에서 앞섰다. 64M, 256M D램은 일본보다 빨리 개발에 성공했다.

이건희 회장은 그다음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세계 정상이 된다는 것은 간단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정상에 서면 자칫 목표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정상이 되기보다 정상의 위치를 고수하기가 더 어려운 까닭입니다.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상은 언제나 위태로운 자리입니다.”

과거 데이터퀘스트(가트너) 자료에 따르면 1991년 매출액 기준으로 메모리 반도체 최고 업체는 일본 NEC였다. 도시바와 히타치가 그 뒤를 따랐다. 삼성전자는 5위에 랭크됐다. 1992년에는 삼성전자가 D램 분야에서 일본 업체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건희 회장의 지시 때문이었을까. 이후로도 이 순위에는 변동이 생기지 않는다.

1997년 3월 5일 이건희 회장은 신(新) 도쿄 구상을 발표한다. 시스템LSI 부문 투자를 본격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D램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한 삼성전자는 이후 시스템LSI, 낸드플래시 시장으로 진출하며 명실 공히 세계 톱 클래스 반도체 업체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한국 반도체 50년]<9> 메모리 반도체 세계 평정… 이젠 우리가 1등이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