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50년]<9> 미국, 한국을 견제하다… 마이크론의 반덤핑 소송 제기

1990년대 현대전자 반도체 생산 라인의 모습
1990년대 현대전자 반도체 생산 라인의 모습

한국 D램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일본으로 향해 있던 미국의 칼끝은 한국을 겨누게 된다. 1992년 미국 마이크론이 삼성, 현대, 금성 등 한국 반도체 3사를 상대로 반덤핑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마이크론은 미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였다. 그해 10월 예비판정에서 한국 반도체 업계는 최대 80% 이상의 반덤핑 관세율을 받았다. 삼성전자가 87.4%로 가장 높았다.

김치락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초대 상근부회장은 “당시 일본은 미국과 맺은 반도체 협정으로 모든 D램을 일정 수준 가격 이상으로 팔고 있었다”면서 “그러던 중 한국 반도체 업체가 일본보다 더 낮은 가격에 D램을 판매했으니 미국이 놀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와 산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반덤핑 관세 80%를 그대로 받으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채 피기도 전에 고사할 수 있다는 우려감이 팽배했다. 다급해진 한국 반도체 업계는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명의로 `한국산 반도체가 미국 컴퓨터 업계에 공헌한다`는 장문의 보고서를 미국 상무부에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상공부 반도체산업과장을 맡고 있던 백만기 과장을 중심으로 `반덤핑 대책 협상전담반`이 꾸려졌다. 한국 정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던 한 서기관을 수시로 만나 조언을 들었다. 그 서기관은 미국 국무부에서 미·일 반도체 협정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반도체 산업계가 죽으면 안 된다고 우리 편을 들어 줬다.

한국 반도체 각사는 미국 컴퓨터 업체인 IBM, HP, 애플 등 대관 담당자를 개별로 설득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메모리를 싸게 구입하는 것이 이익이었기 때문에 우호 입장을 견지했다.

1993년 3월 16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는 현대전자, 금성일렉트론, 삼성전자에 대한 반덤핑 관세율을 확정했다. 각각 7.18%, 4.97%, 0.74%였다. 예비판정에서 최대 80% 이상을 받은 반덤핑 관세율이 이 정도로 낮아졌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예비판정을 고려하면 `기적`처럼 기사회생한 것이라는 견해도 나왔다. 국내 정부와 산업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은 또 한 차례 경악했다. 미국의 제재가 한국을 누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당초 예상보다 너무 낮은 관세율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확정 판결이 나오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통산성의 반도체 담당 과장이 사케 한 병을 들고 백만기 과장을 찾아왔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고 백 과장에게 물었다. 마이크론이 한국 반도체 업체에 소송을 제기한 배경에는 일본이 있었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려 온 터여서 백 과장은 말을 아꼈다.

미국은 `한국을 키우는 것이 일본을 적절하게 견제하고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돕던 주한 미국대사관 서기관은 “한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망하면 미국 컴퓨터 산업계도 큰 피해를 볼 것”이라고 자국 정부를 설득했다. 서기관 주장을 받아들인 당시 주한 미국대사 윌리엄 그레그는 “이 소송으로 자칫 한국 기업이 모두 죽어 버리면 일본 기업만 살리게 된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확정 판결 이후 반도체 3사는 국제무역재판소에 재심을 요구하며 반덤핑 관세를 낮춰 나갔다. 삼성전자는 1995년 8월 0.22%의 판정을 받았고, 그해 12월 상무부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덤핑 혐의를 벗었다. 덤핑 관세율이 0.5% 이하면 혐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현대전자와 금성일렉트론은 덤핑 사실을 벗지 못해 미국 통관 시 상무부에 관세를 예치함과 동시에 매년 조사를 받아야 했다.

2000년 9월 미국 상무부는 드디어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반덤핑 관세를 철회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미국과 반도체 반덤핑 통상 분쟁은 일단락됐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