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표준화기구(ISO) 자동차 반도체설계 생산 가이드라인이 사실상 확정 단계에 들어갔다. 내년 표준이 정식 발효하면 완성차나 전장업체가 가이드라인에 따라 칩 공급사를 결정한다. 일종의 `기술 장벽`이다.
그러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대기업을 포함해 중소 칩 설계 팹리스 업체는 `당장 시장이 없다`는 이유로 가이드라인에 전혀 대응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의 반도체 기업이 몇 년 전부터 가이드라인 작성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제품 설계 및 검증 등 생산 프로세스 전반을 변경하고 있는 것과 상반된다. 한국이 자칫 자동차 반도체 분야에선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 가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과 한국산업기술시험원에 따르면 ISO 도로차량분야(TC22) 전기장치(SC32) 기능안전 워킹그룹(WG8)은 6~10일 제주도에서 개최한 자동차 기능안전 국제표준화 회의에서 ISO 26262 제2판(세컨드 에디션)의 `국제 표준 최종 초안(FDIS)` 항목을 대부분 확정했다.
ISO 26262는 차량 전자장치 오류로 인한 사고 발생 방지를 위해 ISO가 2011년 11월 11일 제정한 기능안전 국제표준이다. ISO 26262에는 파트1부터 파트10까지 전장 부품과 소프트웨어(SW) 관련 설계, 분석, 검증 등 안전요구 사항이 정리돼 있다.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완성차 업체에 부품, SW를 공급하는 게 쉽지 않다. 제2판에는 반도체 설계 분야가 새롭게 추가됐다. 파트11에서 내용이 다뤄진다.
ISO 26262 제2판 FDIS는 7월 독일에서 한 차례 더 논의가 이뤄진 후 올 연말쯤 각국 투표를 거쳐 내년 1월 국제 표준으로 정식 발효된다.
표준화 작업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12일 “이변이 없는 한 FDIS를 토대로 표준이 발효되고, 이를 규정한 ISO 문건도 일반에 공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동차 반도체 안전을 다루는 ISO 26262 파트11에는 A4 용지 180쪽에 걸쳐 방대한 내용이 담겼다. 과거 국내 자동차, 부품 업계는 400쪽 분량의 ISO 26262 파트1~파트10이 첫 발효됐을 때에도 적잖은 혼란을 겪었다. 반도체는 일반 부품보다 설계, 생산 단계가 복잡해 강제 사항이 아닌 가이드라인 형태로 표준에 포함됐지만 수요 업체는 이 가이드라인 준수 여부를 토대로 칩 공급 업체를 선정할 가능성이 짙다.
핵심은 고장률 예측이다. 칩 성능(트랜지스터 개수)과 패키지 형태, 동작 시간, 온도 환경에 따라 해당 반도체가 고장 날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 계산·분석하는 설계를 가미해야 한다. 그에 대한 계산 방법 등이 가이드라인에 포함됐다. 고장이 났을 때 이를 즉각 확인하거나 안전성을 높이는 방법론 등도 파트11에 기술돼 있다. 메모리와 중앙처리장치(CPU), 시스템온칩(SoC) 등 디지털 반도체와 각종 아날로그 반도체를 포함해 자동차에 탑재되는 모든 종류의 반도체가 해당 사항이다.
이 같은 정보를 토대로 차량 안전 등급(ASIL)에 대응할 수 있다. ASIL은 최저 A부터 최고 D까지 4개 등급으로 나뉜다. 세계 완성차 업체는 ISO 26262 첫 발효 이후 주요 부품 협력사에 ASIL 등급을 요구하고 있다.
인텔, 퀄컴, 엔비디아,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온세미컨덕터, 시높시스, 멘토, 르네사스 등 해외 주요 반도체 업체는 지난 몇 년 동안 이 표준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대응력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실리콘웍스를 제외한 국내 주요 반도체 업계는 국제 표준 가이드라인이 정립되는 동안 `옵서버`로도 참여하지 않았다”면서 “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고 `타임투마켓`도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반도체는 대한민국 수출 1위 품목이고 세계 시장에서도 영향력이 크지만 첨단 자동차 시대가 열리면 그 위상이 격하될 지도 모른다”면서 “대응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동호 국가기술표준원 기계소재표준과장은 “국내 반도체 업계에 새로운 세계 표준 내용을 적극 알릴 계기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