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일본, 미국은 자동차 강국이다. 이들 국가에는 선진 자동차 반도체 업체가 있다. 독일 인피니언, 일본 르네사스가 대표 회사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자본 합작으로 탄생한 ST마이크로도 자동차 반도체 시장에선 빼놓을 수 없는 강자다. 미국의 대표 자동차 반도체 업체이던 프리스케일은 네덜란드 NXP반도체로 인수됐지만 NXP는 다시 미국 퀄컴에 피인수됐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독일 메모리 반도체 업체 키몬다는 인피니언 계열사였다. 인피니언은 키몬다에 자금을 지원하다가 자칫 회사 전체가 매각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 독일 정부는 키몬다를 포기했지만 인피니언은 적극 지원했다. 인피니언이 사라지면 반도체-전장부품(보쉬, 콘티넨탈 등)-완성차(BMW, 폭스바겐, 다임러 등)로 이어지는 자동차 산업 생태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도 르네사스가 어려움에 빠지자 공공자금을 대거 투입한 이력이 있다.
◇자동차 반도체 왜 어렵나
첨단 자동차 산업에서 반도체의 중요성은 크게 확대되고 있다. 라스 레거 NXP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앞으로 자동차 혁신의 90%는 전장 분야에서 나올 것”이라며 “전장 기술의 근간은 바로 반도체”라고 설명했다. 바꿔 말해서 반도체 역량이 없다면 남들보다 빨리 혁신을 이루기란 힘들다는 뜻이다.
업계 자료와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면 국내 자동차 반도체 국산화율은 3%에 그치는 수준으로 파악된다. 현대기아자동차는 대부분 자동차 반도체를 독일, 일본, 미국에서 수입해 사용한다. 선진 자동차 업체가 이미 구현해 놓은 기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격을 깎는 것도 선행 기술 도입도 쉽지 않다. 현대자동차는 이 같은 상황을 이겨 내기 위해 2012년 현대오트론을 공식 출범시켰다. 그러나 자체 칩 개발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황이다.
자동차용 반도체는 고도의 신뢰성과 안전성을 갖춰야 한다. 스마트폰, TV 등에 탑재되는 소비자 기기용 반도체는 동작 온도 범위가 0~40도다. 산업용은 이보다 높은 -10~70도다. 자동차 반도체의 사양은 더 높다. -40~155도의 온도 환경에서도 정상 작동이 돼야만 완성차 업체가 써 준다. 고장률은 `제로 수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사람 목숨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 정도 스펙의 반도체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동차 반도체를 다루는 기업이 세계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소비자 기기와 비교하면 자동차는 수명이 길다. 한 번 구입하면 10년 이상 도로를 누비기 때문에 주요 부품인 반도체 역시 긴 동작 수명을 지원해야 한다. 재고 보존, 생산 유지는 `장기간`이 요구된다. 기본 15년에서 길게는 30년이다. 기술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 같은 장기 투자, 생산계획을 소화할 수 있는 반도체 기업은 많지 않다.
임기택 전자부품연구원(KETI) 모빌리티플랫폼연구센터장은 16일 “자동차 반도체는 간단한 제품이라 하더라도 개발 기간이 보통 4~5년으로 길다”면서 “기업 경영자 입장에선 이렇게 긴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을 일”이라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대응 안 했나 못 했나
업계에선 자동차 분야가 최대 부품 시장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선 이름을 거론할 만한 전문 업체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최근 독일 아우디에 인포테인먼트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공급키로 하고 개발 작업에 한창 나서고 있지만 대응 역량은 전반에 걸쳐 떨어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다. `빨리 빨리` 개발하고 판매해 온 소비자 제품군과 달리 자동차 반도체는 개발, 공급에 걸리는 시간이 기본 5년이다. 경영진이 이 시간을 기다려 줄 수 없다는 것이다. 15년 이상 유지해야 하는 생산 체제도 3~5년마다 공정을 바꾸는 삼성전자의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사항이다.
대기업이 `결정` 문제라면 중소 팹리스 업체는 여력이 없다는 분석이 정확하다. 당장 흑자를 내기도 어려운데 수익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자동차 분야에 연구비를 쏟아붓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넥스트칩 사례가 정답이 될 수 있다. 넥스트칩은 전자통신연구원(ETRI)의 ISO 26262 대응 중앙처리장치(CPU) 코어 기술을 이전받아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시스템온칩(SoC)을 만들고 있다.
소비자 기기용 반도체를 다루는 기업이 자동차로 옮겨 가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로는 문화 차이도 거론된다. 최근 소비자 기기용 부품 시장의 화두는 `통합`이다.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 연산을 맡는 AP와 통신 모뎀은 칩 하나로 통합돼 있다. 자동차도 개별 요소는 통합을 추구하지만 전체로는 기능별로 플랫폼이 나뉜다. 크게 보면 동력 계통과 본체, 섀시, 안전, 운전 정보, 보안 등으로 구분된다.
김시호 연세대 글로벌융합공학부 교수는 “동력 계통과 상관없는 내비게이션 기능이 죽었다고 차가 갑자기 멈추면 안 되기 때문”이라면서 “정보기술(IT), 반도체를 하는 사람들이 자동차 쪽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문화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경원 KETI 모빌리티플랫폼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스마트폰 등 IT 분야와 달리 자동차는 지금까지 기계 중심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 시장을 뚫으려면 이런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방법으로 차근차근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자동차에 모든 IT가 총결집되는 시기가 곧 올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당장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반도체 업계는 이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