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 중국 진출에 급제동을 걸었다. 첨단 기술 유출로 첨단산업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은 물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 등 고려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 중국 공장 증설을 추진하던 기업들은 이 같은 방침에 초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계획한 공장 증설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사가 많은 중국 공장 증설이 늦어지면 제때 제품을 공급하지 못해 '타임 투 마켓'에서 실기할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열린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 간담회에서 중국 진출을 재검토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간담회에는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 등 업계의 주요 경영진이 참석했다.
1시간가량 진행된 비공개 간담회에서 백 장관은 삼성전자에 중국 시안 공장 증설 건을 재검토해 줄 것을 권고했다. 백 장관은 “(평택 등)기존 한국 부지에 지으면 되지 꼭 (중국)시안에서 해야 되느냐”면서 “롯데가 사드 때문에 보복당하고 철수한 것을 보라. 반도체는 아직 보복 당한 적이 없지만 중국이 기술을 쫓아오면 똑같이 당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오현 부회장은 즉답을 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지난 8월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에 앞으로 3년 동안 7조8000억원을 투입, 3D 낸드플래시 2기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중국 산시성과 공장 건설을 위한 양해각서(MOU)도 체결했다. SK하이닉스도 중국 우시에 D램 증설 투자를 발표한 바 있다.
업계는 주무 부처 장관이 관련 업계 중국 진출에 부정 견해를 피력하면서 앞으로 중국 투자는 물론 판매 전략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정부가 승인위원회 등에서 부적합 판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D램, 낸드플래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등은 국가 핵심 기술로 지정돼 있다. 정부 연구개발(R&D) 자금이 투입된 국가 핵심 기술은 '산업 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수출 시 정부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승인을 받지 못하면 해외에서 해당 기술을 활용,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 삼성전자 3D 낸드플래시는 정부 R&D 자금이 투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국 시안 1기 라인을 건설할 때 신고만 하고 나갔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제조 시 다양한 요소 기술이 융합되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 신고 사항이 승인 사항으로 변경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해석이 나올 경우 당장 중국에 신공장 건설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중국 광저우에 8세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패널 공장을 지으려 한 LG디스플레이에는 당장 비상이 걸렸다. LG디스플레이는 올해 초부터 정부와 중국 진출 건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당시 탄핵 정국과 중국의 사드 보복 확대 상황이 맞물리면서 논의가 미뤄졌다. 더 늦어지면 판매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감이 높다.
업계 관계자는 “LG디스플레이 8세대 OLED 중국 투자는 지난달에서야 승인 심사에 들어갔다”면서 “백 장관이 기존 디스플레이 분야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별도의 소위원회를 구성,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라는 지시를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백 장관은 이날 기자와 만나 “액정표시장치(LCD)가 중국에 진출했고, 결국 따라잡히지 않았느냐”면서 “중국이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고 OLED 분야로도 접근하면서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백 장관은 “현지 시장 개척이 목적이지만 협력 업체를 통해 어쩔 수 없이 기술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중국 투자의 부정 견해를 공개석상에서 밝혔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는 이날 간담회에서 오는 2024년까지 국내에 51조9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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