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유치하고 졸렬한 속내를 드러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1일 한국으로의 수출 관리 규정을 개정,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인 3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3개 품목은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다. 이들 3개 품목은 오는 4일부터 일본 정부의 수출 승인 허가를 받아야 한다. 길게는 90일이 걸리는 절차다. 일본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3개월 가까이 수출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억지다. 지난달 28~29일 자국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일본이 주장한 '자유롭고 공정하며 무차별적인 무역원칙'과 정면 배치되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양국 신뢰 관계가 현저하게 훼손됐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일본이 노리는 것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를 자국 이해에 맞게 주도하기 위한 압박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징용 관련 판결에 대한 대항 조치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피해는 애꿎은 우리 기업이 보게 될 판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등 국내 업계는 당혹스런 상황이다. 가뜩이나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수출 감소가 7개월 연속 이어지는 가운데 대형 악재가 터졌다. 미-중 무역전쟁과 화웨이 제재 여파가 잠잠해지나 싶더니 이제는 우리 앞마당에 도적이 출현한 셈이다. 수출 제한 대상이 되는 핵심 소재의 재고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지만 재고가 소진된 이후 어떻게 대응할지가 관건이다.
당장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회로 제조 공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소재다. 이들 소재는 일본 업체들이 전 세계 공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본이 우리 산업 구조, 특히 반도체 산업의 약점을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다. 최신 반도체 공정은 웨이퍼 투입부터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2~3개월이 걸린다. 최악의 경우 소재가 없어 공정이 중단되고 재가동해야 하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면 천문학적인 피해가 불가피하다.
정부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국내법은 물론 국제법을 동원하는 등 맞대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이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WTO 제소 절차는 주된 해결 수단이 되기 어렵다. 양국 협상과 조정, 최종 판결에 이르는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WTO 제소는 다른 조치와 병행하는 수단이 돼야 한다.
무엇보다 일본의 조치가 결국 '제 발등 찍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줘야 한다. 우리가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메모리반도체는 일본의 일부 소재에 의존하고 있지만 완제품은 일본도 필요한 부품이다. 그리고 일본 소재 기업들도 한국 반도체업계가 없으면 살기 어려운 구조다. 촘촘히 짜여 있는 글로벌 공급망을 흔드는 조치는 한·일 양국을 넘어 글로벌 정보기술(IT) 산업의 생태계를 뒤흔들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서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 기회에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국산화에 대한 반성도 해야 한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업계와 긴밀히 소통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지원에 만전을 기하고, 우리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을 제고하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는 발언에 주목한다. 일본을 뛰어넘을 장기적이고 촘촘한 소재 연구개발(R&D)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
양종석 미래산업부 데스크 jsy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