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일본 정부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의 생산에 필수 소재인 불화수소,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의 대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전격 시행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경쟁력 강화대책'을 발표하고 중소기업 기술력 향상을 위한 대규모 투자와 지원책을 마련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많은 전문가는 반도체 산업 등 한국의 산업 발전을 제어하고 경제력 우위 지속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소부장 등 기술이 우위에 있는 만큼 한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승산이 있다는 내부 판단도 무모한 도발 행위의 추진 동력이 됐을 것이다.
소부장을 포함한 산업 기술은 일본, 대만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중소기업이 담당하고 있다. 또 작은 중소기업이라 해도 대기업과의 수평 관계를 통해 기업 간 협력·분업·공존·상생을 도모하는 기업 문화와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의 기술 탈취 문제로 매년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국내 중소기업에는 그저 부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기술 유출 피해를 본 국내 중소기업이 246개사에 이르며, 피해 규모만 5400억원에 이른다. 기술 유출 사례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 기업 수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다행히 최근 중기부가 대·중소기업 간 거래에서 일어나는 기술 유용 행위의 억제 효과를 보기 위해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개정안에는 대기업의 기술 유용 행위 등을 억제하고 이에 대한 처벌 및 구제 정도를 강화해 달라는 중소기업계의 강력한 호소가 반영돼 있다.
그러나 상생협력법 개정안은 1년이 넘도록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기술 유출에 대해 피해 중소기업이 입증해야 할 사실을 가해 추정 대기업이 입증하게 한다는 내용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기술 탈취 피해를 본 중소기업이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기술이 유용됐음을 입증하기 위해 가해자로 추정되는 대기업 기술에 대한 도면, 회로, 코드, 공정 등을 샅샅이 조사하고 이를 데이터화해서 비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기업은 기술 개발 조직 및 인력을 갖추고 있어 자사 기술이 중소기업 기술과의 차별성이 있음을 과학으로, 기술로 얼마든지 입증해 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입증 책임이 전환된다 해도 대기업에는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환경오염피해 배상책임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의 경우 환경오염 피해 발생 시 사업자에 무과실 책임을 지우고 인과관계도 있는 것으로 추정함으로써 사실상 입증 책임을 전환하는 등 타 법률에도 이와 관련 선례가 있으며, 개정 전 상생협력법에서도 이미 납품 대금 삭감 등 갑질 행위에 대해 입증 책임을 피해 기업이 아니라 가해자인 위탁 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반대론자들이 제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술 탈취 입증 완화 등 조치가 기업의 경제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주역이 돼야 할 스타트업·벤처·중소기업들이 공들인 기술을 한순간에 빼앗기고 좌절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기술을 유용 당한 중소기업에는 생존 문제로 직결되는 사안이다. 그들의 노력이 성공으로 이어지고 그 성공이 또 다른 성공을 낳기 위해서는 기술 탈취를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원칙이 반드시 바로 서야 한다.
중소기업들이 활기차게 기술 개발을 하고 그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법제사법위원회에 묶여 있는 상생협력법이 이번 20대 마지막 국회에서 조속히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황보윤 법무법인 공정대표변호사 law-kee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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