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연구개발(R&D) 투자 100조원 시대가 열린다. 정부가 R&D 투자를 시작한 지 60여년 만으로, 100조원 클럽에 가입하는 다섯 번째 나라가 된다. 명실상부 R&D 선도국 반열에 올라선다.
우리나라는 선진국보다 늦게 과학기술 R&D 투자를 시작했지만 정부·민간 협력으로 후발국 한계를 극복하고 단기간에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전자, 반도체, 철강, 조선 등 주력 산업은 세계 정상권 기술 경쟁력을 확보했고,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상황이 녹록지 않다.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민간 R&D 투자 여력이 상당 부분 감소한 상황에서 주력 산업 침체, 글로벌 가치사슬 재편 등 전에 없는 변화에 직면했다.
재도약 발판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세계를 선도할 신성장동력을 발굴, 경쟁력을 확보하고 그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던 환경·보건 등 국민 삶의 질 관련 투자도 과감히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자신문은 R&D 100조원 시대를 맞아 3회에 걸쳐 그간 R&D 성과를 돌아보고 미래 투자 전략을 모색한다.
◇R&D 100조원 시대 개막
우리나라 연간 총 R&D 투자는 올해 100조원에 육박하거나 넘어설 전망이다. 정부와 민간 R&D 투자는 지난 2018년 86조원, 2019년 89조원을 기록했다. 아직 정확한 집계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지난해엔 90조원 중반대를 기록한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 정부 R&D 투자가 전년 대비 약 3조원 이상 늘어났고 그간 민간 R&D 투자 증가율 등을 감안하면 100조원 달성이 어렵지 않다는 전망이다.
우리보다 앞서 100조원 클럽에 가입한 나라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4개국뿐이다. 총 투자 규모에선 이들 국가가 앞서지만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2018년 기준 10여년간 총 R&D 투자액 격차는 미국과 9.3배에서 5.9배, 일본과 3.4배에 1.74배, 독일과 1.8배에서 1.4배로 줄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R&D가 차지하는 비중은 수위권이다. 2019년 기준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4.64%로 이스라엘(4.94%)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다.
투자 증가율은 중국과 1, 2위를 다툰다. 2018년 기준 최근 10년간 R&D 투자 증가율은 9.5%로 중국(12.4%)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최근 3년간 증가율은 8.6%로 중국(8.5%)을 제치고 1위다.
R&D 투자 규모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 관심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 삶의 질 수준과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 역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우리나라가 명실상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것을 입증한다.
◇성장 신화 뒷받침한 R&D
우리나라가 R&D 투자를 시작한 건 1963년이다. 정부는 12억원을 시작으로 과학기술연(1966년), 원자력연(1973년), 표준연(1975년), 전자기술연, 선박해양연, 화학연(이상 1976년), 통신기술연(1977년)을 연이어 설립했다.
민간이 R&D 투자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가 과학기술 인재 양성, R&D 역량 확보를 위한 마중물을 제공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국가 성장동력 마련과 더불어 기초연구 투자를 시작한 것은 당시로선 획기적 시도다.
국가 재정이 빠듯한 상황에서도 R&D는 확대 기조를 지속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민간 R&D 투자는 전년 대비 11.2% 급감했지만 정부 투자는 4.4% 증가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해 민간 R&D 비중은 3%P 감소한 데 반해 정부 투자는 3%P 증가했다.
정부 R&D 투자는 분야별 재정 통계가 도입된 2005년 이후 지속 증가 추세다. 특히 현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이후 투자 확대 기조가 뚜렷하다. 2019년 R&D 예산이 처음으로 20조원을 넘어선 데 이어 올해 28조원에 근접했다. 증가율은 2018년 7.1%를 기록한 뒤 9.5%, 9.1%, 8.9%를 기록했다.
민간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국가 R&D 주축으로 발돋움했다. 정부가 R&D 투자를 시작할 당시 민간 비중은 3%에 불과했지만 1981년 56%로 정부를 추월했다. 2018년엔 처음으로 80%를 넘었다.
우리나라 R&D 투자는 선진국보다 늦었지만, 단기간에 산업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민간 역할이 제대로 맞물렸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기술 격차가 뚜렷했던 조선·반도체·ICT 등 분야에서 추격형 전략을 구사, 민관 협력을 통해 빠른 시간 내 기술 격차를 좁혔을 뿐만 아니라 추월했다.
1986년부터 1992년까지 1800억원을 투자한 '초고집적반도체공동기술개발사업'은 민관 협력 대표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반도체 3사가 참여한 사업을 통해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어 '차세대반도체기반기술개발사업'에선 세계 최초 1G D램 개발에 성공한다.
ICT 분야에선 디지털 전자교환기 TDX-1 국산화 성공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1986년 240억원을 투자한 사업은 이후 1가구 1전화, 국내 통신산업 생태계 조성, 이동통신 선진국 진입 발판이 됐다.
이어 CDMA 방식 세계 최초 상용화, 광대역종합정보통신망 기술개발 등 성과가 이어졌다. 글로벌 이동통신 표준이 TDMA에서 CDMA로 전환되는 계기이자, 우리나라 기업이 와이브로·LTE·5G 등 통신 산업을 선도하는 원동력이 됐다.
바이오·신약 분야에선 '신의약·신농약 기술 개발(G7 프로젝트)'을 통해 국산 1호 신약(항암제) 개발, 세계 10번째 미국 FDA 신약허가 취득에 성공했다.
논문·연구원 수 등 과학기술 기초 체력도 다졌다. SCI급 논문 수는 1981년 251건(46위)에서 2018년 6만3311건(12위)으로 늘었다. 최근 10년간 논문 수 증가율은 83%로 세계 2위다. 정부 R&D 100만달러당 논문 수는 3.14건으로 독일(3.08건)을 역전했다.
국제통화기금이 발표한 지난해 국가 GDP 순위(잠정)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0위에 올라설 것으로 예상된다. 1980년 26위에서 40년 만에 10위권에 진입한다. 우리나라보다 상위권 국가 대부분은 80년대 이후 10위권을 계속 유지한 국가로 새롭게 진입한 나라는 인도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우리나라가 자원 부족을 기술력으로 극복하고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R&D가 중추 역할을 했다는데 이견이 없다.
다만, 중소기업 R&D 역량 강화와 투자 분야 다변화 등은 과제로 남았다.
2018년 기준, 총 R&D 투자는 85조7000억원이다. 민간기업은 이 중 68조8000억원을 지출했다. 대·중견기업 R&D 비중은 77.6%, 중소·벤처기업 비중은 22.4%로 나타났다.
중소·벤처기업 투자 비중은 2009년 29.1%를 기록한 뒤 지속 하락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 R&D 투자 부진이 장기화하고 있다는 신호다.
같은 해 기준으로 전체 35.8%에 해당하는 31조원이 ICT 분야 R&D에 집중됐다. 상대적으로 투자가 부진한 환경·바이오·우주 등 분야로 기술 저변을 확장해야 하는 상황이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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