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하굣길에 종종 '뽑기'를 했다. 몇 푼 돈을 내면 도전 기회가 주어지는 놀이다. 내가 먼저 상품명이 적힌 막대기를 1~100까지 숫자가 적힌 판에 신중하게 올려놓으면 뽑기 아저씨(또는 아주머니)가 잘 접힌 종이가 수북이 들어 있는 통을 내민다. 나는 막대기를 올려놓을 때보다 더욱 신중하게 종이 하나를 뽑는다. 펼쳐진 종이의 숫자와 같은 칸에 막대기가 올려져 있으면 '당첨', 숫자가 맞지 않으면 '꽝'이다.
상품은 설탕엿이다. 가늘고 넓적하다. 크기가 클수록 상위 상품이다. 보통 '거북선' '남대문' 모양이 1등 상에 해당한다. 아쉽게도 받은 적은 없다. 처음부터 이들 1등 상 모양은 막대기에 드물게 있어서 확률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운이 좋으면 '레어템'을 얻는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다행히 돼지저금통을 깨뜨려서 달려들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디지털 놀이가 풍성하지 않던 시절에는 나름 재밌는 아날로그 놀이였다.
최근 게임업계에서 확률형 아이템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확률형 아이템은 이용자가 게임 내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강화할 수 있는 도구를 뽑기 형태로 획득하는 것이다. 효과가 높은 아이템일수록 획득 확률은 낮다. 이용자는 이를 얻기 위해 계속 돈을 쓴다. 수백, 수천만원을 쓰는 헤비 유저도 있다고 한다.
확률형 아이템은 게임사의 비즈니스 모델 가운데 하나다. 게임사는 확률형 아이템으로 수익을 올리고, 게임의 흥미를 높이기도 한다. 이용자도 낮은 확률을 알고 있지만 게임에서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지갑을 연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게임사의 과도한 수익 추구가 독으로 돌아왔다. 확률을 지나치게 낮게 설정함으로써 이용자가 점점 더 많은 돈을 쓰게 했다. 어떤 아이템은 여러 개를 모아 완성하는 형태(컴플리트 가챠)로 만들어 획득 확률을 더욱 낮췄다. 이런 가운데 일부 게임사에서는 확률 조작 의혹까지 제기됐다.
자연스레 이용자 불만이 거세졌다. 국회는 이를 등에 업고 확률형 아이템의 규제 수위를 높이겠다고 나섰다. 특정 아이템의 유형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발의했다.
과도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규제 또한 과도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우려된다. 업계가 시행하고 있는 자율규제를 개선하고 투명한 방향으로 서비스를 운영하도록 유도하면 되는데 또다시 '게임=악'이라는 그릇된 전제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게임을 사행성 도박의 일종으로 보고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소관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게임은 하나의 놀이터다. 일부 문제를 이유로 놀이터 자체를 '악'으로 몰아간다면 해법을 찾을 수 없다.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지금의 비판은 게임이라는 놀이터를 더 즐거운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발길을 끊게 하려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 이용자들은 놀이터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용자의 목소리는 자신이 즐기던 게임을 셧다운이 아니라 계속 즐길 수 있도록 개선해 달라는 요구로 모인다. 국회를 비롯한 규제 당국도 이를 명심해야 한다. 우리 게임 시장이 이번 위기를 새로운 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강도 높은 전방위 규제만이 능사는 아니다.
게임사의 반성도 수반돼야 한다. 즐거운 놀이터인 게임을 사행성 도박에 근접한 수준으로 만든 것에는 게임사의 책임이 없지 않다. 늦었지만 이용자와 '윈윈'하는 방향으로 게임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
이호준 ICT융합부 데스크 newleve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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