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판은 쇼티지(공급 부족) 상황입니다. 반도체 업체가 기판 회사에 자금을 지원해서 투자를 유도할 정도입니다.” 경계현 삼성전기 사장은 지난 9월 전자신문사 주관으로 열린 '글로벌 테크 코리아 2021' 기조연설에서 세계 반도체 기판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최근 삼성전기 사업 가운데 가장 뜨거운 것이 반도체 기판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경 사장의 예측은 현실로 나타났다.
삼성전기는 수요 폭증에 대비하기 위해 반도체 증설에 약 1조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앞둔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기판은 반도체와 메인보드 간에 전기 신호를 전달하는 부품이다. 반도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반도체 패키징 기판으로 불린다. 반도체 기판 증설에 1조원 투입은 전례 없는 일이다. 1조원은 삼성전기가 지난 2020년 한 해 투자한 설비투자 금액(총 7205억원)을 뛰어넘고, 지난해 기판 부문에 집행한 금액(859억원)의 12배에 이른다. 집행 기간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기존 투자와 비교해도 파격이다.
대규모 투자는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패트릭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올해 7월 실적 발표에서 반도체 기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했을 정도다. 인텔은 삼성전기 반도체 기판의 전략 거래처다.
기판 부족은 플립칩-볼그리드어레이(FC-BGA)가 특히 심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FC-BGA는 주로 전기 신호 교환이 많은 고성능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패키징에 활용되는 기판이다. 쉽게 말해 인텔, AMD, 엔비디아 등이 만드는 칩에 사용된다. 인공지능(AI)·데이터센터·전기차 시장이 성장하면서 CPU와 GPU 등 고성능 칩 수요가 늘었고, 이에 따라 FC-BGA가 부족해졌다. 또 CPU·GPU 코어 증가로 필요한 기판의 크기도 커짐에 따라 기판 수요가 더 늘었다.
반면에 FC-BGA는 기술 진입 장벽이 높아 공급이 한정됐다. 이비덴, 신코덴키, 삼성전기 등 10여개 업체만 FC-BGA를 양산하고 있다. 고성능 제품은 더 제한돼 있다. 수요는 늘어나는데 공급은 한정돼 쇼티지가 심화한 것이다. 삼성전기의 증설 투자금 가운데 상당수가 FC-BGA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FC-BGA에서 시작된 반도체 패키지 기판 부족은 모바일용 반도체에 사용되는 플립칩-칩스케일패키징(FC-CSP)으로도 옮겨 붙었다. 코로나19에 따른 태블릿 등 모바일 기기 판매가 증가한 데다 세계 1위 PCB 제조업체인 대만 유니마이크론 FC-CSP 공장에서 지난해 10월과 올해 2월 화재가 연속 발생하면서 수급이 더 불안정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삼성전기는 FC-BGA 외에도 FC-CSP 증설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기는 세종과 부산 사업장에서 반도체 기판을 생산하고 있다. 세종과 부산 공장 증설이 유력한 가운데 일부 기판은 베트남 투자 가능성도 제기된다. 삼성전기는 베트남에서 디스플레이용 기판으로 주로 사용되는 '경연성 인쇄회로기판'(RF-PCB)을 생산했지만 RF-PCB 사업은 올해 안에 철수할 예정이다. 반도체 기판 부족은 수년 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선 오는 2024년 FC-BGA 수요가 공급 능력보다 40% 초과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삼성전기는 올해 최대 실적 달성을 예고하고 있다. 올 2분기에 창사 이래 최대 분기 실적(매출 2조4755억원, 영업이익 3393억원)을 달성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올해 매출 9조7700억원, 영업이익 1조4300억원으로 연간 최대 영업이익 달성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도체 기판 호황이 더해지면 삼성전기의 양적·질적 성장이 기대된다. 고부가가치 사업 중심으로 회사를 재편하고 있는 경 사장의 경영 전략이 빛을 발하고 있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