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자국에 반도체 생산거점을 구축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법을 제정한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 소지를 무릅쓴 초강수다.
미국·중국 중심으로 격화된 세계 반도체 패권 경쟁에 대만, 유럽은 물론 과거 영광을 재현하려는 일본까지 가세했다. 각국이 정책을 총동원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8일 일본 정부가 첨단 반도체 생산기업을 지원하는 법·제도를 마련한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자국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는 기업에 조건부로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한 근거를 담는다. 현재 구마모토현에 신공장을 짓고 있는 TSMC가 사실상 첫 수혜기업이다.
일본 정부는 5세대(5G) 이동통신 기술 개발기업 등을 대상으로 한 관련 법에 반도체를 신규 품목으로 추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하고 다음 달 예정된 임시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한다. 보정(추경)예산안에서 수천억엔을 확보한 후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 기금을 마련한다.
보조금 지급 전제 조건은 '첨단 반도체 공장건설'이다. 이후 △공장 가동 후 안정적 생산·투자 △계속적 기술 개발 △일본 내 반도체 수급난 시 증산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관련 법 준수 등을 요구할 계획이다. 이를 위반한 사업자에는 보조금 반환을 요구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WTO는 공정 무역에 지장이 없도록 정부 산업 보조금 규칙을 마련했다”면서도 “보조금은 운영 방식에 따라 외국의 WTO 제소를 받을 위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의 가세로 차세대 반도체 시장 주도권 경쟁은 한층 치열해졌다. 주요국이 안정적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생산기지를 자처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대규모 지원정책을 속속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도체 제조에 520억달러(약 61조6200억원)를 지원하는 '혁신경쟁법' 가동을 앞두고 있다. 지난 6월 상원에서 가결됐고, 하원 통과도 임박했다. 국내외 기업을 통틀어 미국에 반도체 생산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업에 대대적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수혜기업으로는 삼성전자, 인텔, TSMC 등이 꼽힌다. 특히 삼성의 반도체 생산공장 유력 후보지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는 삼성전자에 첫 10년 동안 공장 부지에 대한 재산세 92.5%를 환급한다는 파격 지원안을 제시했다. 이후 10년 동안 90%, 추가 10년 동안 85%를 보조금 형태로 돌려주기로 했다.
유럽도 공격적 투자 유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독일·프랑스 중심 유럽연합(EU)이 최대 500억유로(약 68조5000억원)를 반도체 산업에 투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기술 개발에서 생산 인프라까지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EU는 인텔의 유럽 파운드리 건설 공식화에 따라 보조금 지원 범위를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국가핵심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반도체특별법)으로 국내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섰지만 업계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산업계는 외국의 파격적 인센티브에 견줄 만한 충분한 세액 공제를 기대했다. 그러나 지원 대상이 연구개발(R&D)에 치우쳐 있고, 지원 가능 여부도 아직 불투명하다. 토지와 일자리 창출에 초점을 맞춰 반도체 생산 거점을 자국에 확보하려는 외국 정부에 비하면 기업 투자를 끌어낼 유인책이 부족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